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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12화

어머니의 미소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흙을 쥐는 손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숲에서 맑은 솔향이 파도처럼 밀려 내려왔다.

 

충청북도 제천, 옛 폐교 분교 사택을 개조한 소박한 단층 목조 가옥의 앞마당에는 초여름의 따스한 햇살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당 한편에 단정하게 일궈진 네모반듯하지 않은 작은 화단 앞,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강우진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손에는 작고 낡은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검은 흙을 한 삽 조심스레 떠내고, 그 자리에 붉고 노란빛을 머금은 채송화와 패랭이꽃 모종을 다정하게 내려놓는 손길에는 일말의 조급함도 없었다.

 

어머니는 손가락 끝으로 모종 주변의 부드러운 흙을 꼭꼭 눌러주었다.

 

흙먼지가 묻어 거칠어진 손가락마디, 손등 위에 희미하게 불거진 푸른 핏줄 사이로 스며드는 흙의 온기를 가만히 음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진은 마당 입구의 싸리문 곁에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사동 갤러리에서 채린의 전시회를 축하하고 돌아온 지 하루 만이었다.

 

상도동 작업실 마당에 백 년 된 벼락 맞은 참나무를 부려놓은 뒤, 우진은 문득 밀려드는 벅찬 감정과 함께 부모님이 계신 이곳 제천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었다.

 

그리고 지금, 마당에 들어선 우진의 시야에는 그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맺히지 않았다.

 

과거 15년 동안, 우진이 어머니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망막을 짓누르던 것은 언제나 잿빛에 가까운 희미한 네모, 혹은 금방이라도 날카롭게 갈라져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세모의 실금들이었다.

 

어머니의 머리 위에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검은 실선 잔상이 내려와 가녀린 목덜미를 옥죄고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꼭두각시 줄이기도 했지만, 실종된 남편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 세상의 시선에 쫓기듯 숨죽여 살아야 했던 불안, 그리고 어린 아들의 관자놀이에 남겨진 흉터를 보며 매일 밤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어미의 처절한 원망의 족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어머니의 머리 위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도형도, 숫자로 환산되는 인과율의 압박도, 붉은 에러 로그도 없었다.

 

오직 부드러운 초여름 바람에 하늘거리는 밀짚모자의 레이스 끈과, 흙을 만지는 어머니의 평온한 숨소리만이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우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관자놀이에 깊게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는 이제 아무런 통증도, 발열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단단하게 아문 살갗의 감촉으로 그곳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엄마."

 

우진이 나지막이 불렀다.

 

흙을 토닥이던 어머니의 손이 뚝 멈추었다.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당 어귀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어머니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어머, 우진이니?"

 

밀짚모자 챙 아래로 드러난 어머니의 얼굴에 화들짝 놀란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 놀람은 예전처럼 불길한 소식이나 빚쟁이의 독촉, 혹은 경찰의 방문을 두려워하던 공포의 경련이 아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자식을 마주한 평범한 어머니의 순수한 반가움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며칠 전에 생일이라고 다녀가 놓고는."

 

어머니는 흙 묻은 면장갑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조금 시린지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일어서는 동작조차, 억겁의 세월을 짓누르던 족쇄에서 벗어난 사람의 온전한 자연스러움을 띠고 있었다.

 

"그냥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엄마 꽃 심는 거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마당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2. 백 년의 상처와 꽃밭

 

어머니는 손바닥에 묻은 마른 흙을 털어내며 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아들의 머리칼, 깊고 맑아진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 그리고 평온하게 풀어진 입매를 확인한 어머니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네. 서울 공기가 텁텁하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목공 일 시작하고 나서는 아주 딴사람이 됐어."

 

"나무 만지는 게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라고요. 몸은 정직하게 피곤한데, 머릿속은 아주 개운해요."

 

우진은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화단에는 이미 정성스레 심긴 금잔화와 봉선화, 은방울꽃이 알록달록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규격화된 화분이나 반듯한 플라스틱 테두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산에서 주워 온 둥글넓적한 자연석들을 삐뚤빼뚤 둘러놓았을 뿐인데도, 흙과 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기분 좋은 생기를 뿜어냈다.

 

"이 꽃들은 어디서 났어요? 지난번엔 못 보던 건데."

 

"아랫마을 이장 댁에서 모종을 한 바구니 나눠주더구나. 마당 구석이 휑하다고 했더니, 심어두면 내년 봄에 씨가 떨어져서 마당 가득 필 거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옆에 놓인 작은 물뿌리개를 들어 올렸다.

 

우진이 자연스럽게 물뿌리개를 건네받아 화단 위로 부드럽게 물을 뿌려주기 시작했다.

 

조리개 끝에서 쏟아지는 물방울들이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산란시키며 마른 흙을 짙은 갈색으로 적셔 들어갔다.

 

촉촉하게 젖어 드는 흙냄새가 코끝을 기분 좋게 찔렀다.

 

"포천에서 큰 나무를 하나 가져왔어요."

 

우진이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큰 나무?"

 

"네. 테헤란로…… 그 자리에 생태 공원이 들어서거든요. 거기에 시민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큰 원목 쉼터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 중심에 세울 백 년 된 참나무예요."

 

물을 뿌리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우진이 덧붙였다.

 

"벼락을 맞아서 한쪽이 까맣게 타고 깊은 상처가 난 나무예요. 보통 가구 공장에서는 쓸모없다고 버리는 목재인데, 벼락을 맞고도 백 년 동안 옹이를 감싸 안으면서 버텨냈더라고요. 강철보다 단단해요."

 

어머니의 시선이 가만히 아들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테헤란로'라는 세 글자가 나오는 순간, 과거의 어머니라면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떨었을 터였다.

 

그곳은 15년 전 남편이 사라졌던 지옥이었고, 대한민국 전체를 집어삼키려던 거대한 기계 괴물이 숨 쉬던 어둠의 진원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의 그림자가 없었다.

 

"벼락을 맞았는데도 단단하단 말이지."

 

어머니가 조용히 읊조렸다.

 

"네. 아주 단단해요. 그 상처 자리를 억지로 깎아내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기둥으로 쓸 생각이에요. 사람들이 그 옹이를 만지면서 쉴 수 있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상처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니. 비바람 다 맞고 모진 벼락까지 견뎌낸 나무라야 사람들을 편하게 기대 쉬게 해줄 수 있는 법이지."

 

어머니는 다시 모종삽을 쥐고 남아 있던 채송화 모종 하나를 들어 올렸다.

 

어머니의 손등에 박힌 검버섯과 굳은살이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15년 전, 아버지가 실종된 후 어머니의 삶은 끝없는 도망의 연속이었다.

 

'남편이 국가 기밀을 유출하고 도망쳤다'는 정부의 거짓 발표, 매일같이 집 앞을 서성이던 넥스트 큐브의 감시관들, 그리고 하루아침에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겪어야 했던 수모.

 

어머니는 어린 우진을 지키기 위해 단 한 순간도 다리를 뻗고 자지 못했다.

 

한밤중에 작은 발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 창밖을 훔쳐보았고, 낯선 전화벨 소리에는 숨이 턱 끝까지 막혀 울음을 삼켰다.

 

식당 설거지, 건물 청소, 시장 배추 다듬기까지 거친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며 아들을 키워내면서도, 어머니는 늘 아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아빠는 멀리 중요한 연구를 하러 가신 거야. 곧 돌아오실 거란다.'

 

그 거짓말을 내뱉을 때마다 어머니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말을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반복해야 했던 그 형벌 같은 세월.

 

어머니의 가슴속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세상을 향한 증오, 그리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굳은 옹이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었을 터였다.

 

"엄마, 15년 동안…… 많이 무서웠죠."

 

우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우진이 어머니의 흙 묻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손이 흙더미 위에서 천천히 멈추었다.

 

3. 15년의 어둠을 지나

 

사택 뒤편의 대나무 숲이 바람에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모종삽을 흙에 꽂아두고,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햇살 아래 드러난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메말라 있었지만, 그 손에서는 살아 있는 흙의 생명력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마루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마루 문 너머로, 휠체어에 앉아 커다란 노란 격자 공책에 흑연 연필로 무언가를 묵묵히 적어 내려가고 있는 강정호 박사의 옆모습이 보였다.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남편은 더 이상 시스템의 생체 프로세서도, 죄책감에 짓눌린 괴물도 아닌 평범한 노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서웠지."

 

어머니가 아주 담담하게, 마치 어제 지나간 소나기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하루도 무섭지 않은 날이 없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릴까,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혹시 그 사람들이 널 잡아가진 않았을까……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단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 인간들이 네 아버지를 파렴치한 범죄자로 만들고, 우리를 쥐새끼처럼 감시할 때마다 세상이 저주스러웠어. 네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베갯잇을 적시며 소리를 지른 적도 셀 수 없었지. 왜 우리를 두고 떠났냐고, 도대체 그 잘난 연구가 뭐라고 처자식을 이 지옥 속에 내팽개쳤냐고."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격정이 없었다.

 

지나간 고통을 억지로 포장하지도, 애써 축소하지도 않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우진아."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에 맑은 온기가 번져 있었다.

 

"아산병원 704호 병실에서, 그 사람이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서 내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을 잡는 순간 그 오랜 원망이 거짓말처럼 다 녹아내리더구나."

 

어머니의 입가에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그 사람 손에 박힌 굳은살, 목덜미에 남은 그 끔찍한 쇠붙이 자국들을 보는데…… 아, 이 사람도 지옥 속에 있었구나. 우리만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라, 이 사람도 15년 동안 우리를 살리려고 온몸으로 그 지옥을 버텨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어머니는 우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흙먼지가 묻은 거친 손바닥이었지만, 그 어떤 비단보다 따뜻했다.

 

"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머리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내 가슴은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어. 네 머릿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해열제나 쥐여주며 괜찮을 거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지. 그게 어미로서 얼마나 큰 죄책감이었는지 넌 모를 게다."

 

"엄마……."

 

"하지만 이제 안 아프잖니."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그 어떤 그늘도, 과거의 불안도 묻어 있지 않았다.

 

"네가 더 이상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지 않고, 네 아버지가 더 이상 차가운 쇠통 속에 갇혀 신음하지 않는데…… 내가 무슨 원망을 더 마음에 품고 살겠니. 이렇게 살아서 셋이 한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어머니는 손을 거두어 다시 화단의 흙을 만졌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그 끔찍했던 15년이, 이 작은 꽃 한 송이 심는 평화 하나로 다 씻겨 나가더구나. 이제는 밤에 자다가 문소리가 나도 가슴이 철렁하지 않아. 그저 바람이 부는가 보다, 산짐승이 지나가는가 보다 하고 다시 눈을 감는단다. 그게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인지 모르지?"

 

우진은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되찾은 것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순간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했던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리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꽃을 심을 수 있는 자유였다.

 

4.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기 둘이서 무슨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고 있어?"

 

마루 문이 드르륵 열리며, 굵직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마당으로 울려 퍼졌다.

 

휠체어 바퀴를 손수 굴리며 마루 끝으로 다가온 강정호 박사였다.

 

강정호는 무릎 위에 두툼한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지만, 안색은 병원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셔츠 깃 너머로 보이던 목덜미의 생체 소켓 흉터는 엷은 살색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몽당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비밀 이야기는 무슨 비밀 이야기예요. 당신 아들이 테헤란로 공원에 둘 큰 쉼터 기둥으로 쓸 백 년 된 참나무를 구해왔다잖아요."

 

어머니가 모종삽을 든 채 짐짓 쌀쌀맞은 척 대꾸했지만,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번져 있었다.

 

"허허, 참나무라. 그것도 벼락 맞은 거목이라지?"

 

강정호가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며 안경을 고쳐 썼다.

 

"어제 포천에서 올라온 사진을 서연 양이 메신저로 보내줬단다. 아주 기상이 당당하더구나. 상처가 깊을수록 나무는 그 부위를 더 단단한 섬유질로 메워내는 법이지. 사람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아."

 

"아버지, 또 학자 티 내시네."

 

우진이 피식 웃으며 마루 쪽으로 걸어갔다.

 

"학자 티가 아니라 진리란다. 자연의 통계는 언제나 결손을 메우는 과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양성을 만들어내지. 억지로 곧게 뻗은 규격목보다, 비바람에 굽이치고 상처 입은 고목이 훨씬 풍성한 그늘을 만드는 법이다."

 

강정호는 마루 밑으로 다가온 아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아버지의 체온은 굳건하고 따뜻했다.

 

과거 역삼역 지하 7층,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튜브를 꽂은 채 죽어가던 생체 프로세서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제 그저 아들의 성장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의 늙은 아버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니?"

 

어머니가 마당에서 흙 묻은 장갑을 완전히 벗어 던지며 일어섰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버스 타고 오느라 아침도 대충 때웠을 텐데. 마침 아침에 이장 댁에서 가마솥에 쑨 도토리묵을 한 쟁반 가져다주셨거든. 텃밭에서 뜯은 쑥갓이랑 상추 넣고 매콤새콤하게 무쳐줄 테니까 손 씻고 들어오렴."

 

"어머니, 저 된장찌개도 먹고 싶어요. 지난번에 끓여주신 달래 넣은 거요."

 

우진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응석 부리듯 말했다.

 

대기업 태성C&I에서 매일같이 목을 조여오던 넥타이를 매고, 엑셀 수치와 보고서 일정에 쫓겨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투정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우진을 흘겨보며 혀를 끌끌 찼지만,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알았다, 녀석아. 달래는 진작에 다 들어갔지만, 뒷산에서 뜯어다 말려둔 취나물이 있으니까 그걸로 구수하게 끓여주마. 당신도 얼른 방으로 들어가요. 바람 오래 쐬면 무릎 쑤신다면서 왜 나와 있어?"

 

"임자 음식 솜씨 구경하려고 나왔지. 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마루에서 맡고 어떻게 방 안에만 있겠소."

 

강정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어머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마당 가득 울려 퍼지는 어머니의 웃음소리는, 맑은 시냇물이 자갈을 굴리며 흘러가는 소리처럼 청량하고 포근했다.

 

5. 밥상 위의 온기

 

사택의 작은 부엌에서는 이내 달그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들이 피어올랐다.

 

도마 위에서 경쾌하게 칼질하는 소리, 뚝배기 속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 그리고 고소한 들기름에 버무려지는 도토리묵의 향기가 집 안 구석구석을 따스하게 채웠다.

 

우진은 마루 끝 수돗가에서 찬물로 손을 씻었다.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지하수는 손이 저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마저 살아 있는 감각으로 생생하게 와닿았다.

 

손을 털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강정호가 앉은뱅이 밥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면에는 우진이 참나무 자투리로 손수 깎아 선물했던 '참나무 옹이 가족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 한가운데, 15년 전의 상처를 상징하듯 단단하게 박힌 옹이 나무틀 속에서, 일곱 살 우진과 젊은 날의 부모님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워졌던 기억의 공백은 이제 더 이상 차가운 텍스트가 아니었다.

 

매일 마주하는 부모님의 얼굴과, 밥상 머리에서 나누는 온기 어린 대화들이 그 공백을 가장 따뜻한 빛깔로 채워주고 있었다.

 

"우진아, 밥상 날라라."

 

부엌문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엄마."

 

우진은 부엌으로 가 쟁반 가득 차려진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갓 지은 보리밥, 텃밭에서 갓 따온 아삭이고추와 쌈장, 그리고 투박하게 썰어낸 묵무침이 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세 사람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숟가락을 들어 우진의 밥공기 위에 큼직한 묵 한 점을 얹어주었다.

 

"많이 먹어라. 살이 좀 내린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살 안 빠졌어요, 엄마. 요즘 나무 대패질하느라 근육이 붙어서 그래요."

 

우진이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며 뼛속까지 훈훈한 온기가 차올랐다.

 

강정호 역시 숟가락을 들고 찌개를 한 술 뜨더니 감탄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임자 된장 맛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려. 병원 밥은 통 모래알 씹는 것 같더니,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소."

 

"말이라도 못하면. 그렇게 맛있는 양반이 아까는 왜 반찬 투정을 하셨누?"

 

"내가 언제 투정을 했다고 그러시오. 그저 고기가 조금 아쉬웠다고 혼잣말을 한 것뿐이지."

 

"저녁에 이장 댁에서 토종닭 한 마리 잡아 오기로 했으니까 잔말 말고 드세요. 하여간 학자 양반이 고기 밝히는 건 여전해."

 

티격태격 오가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우진은 밥공기를 비워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흔해 빠진 식탁의 풍경.

 

하지만 이 풍경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차가운 격자망의 감옥 속에서 신음하며 스러져 갔던가.

 

우진의 머릿속에 역삼역 지하에서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자아를 불태워 우진을 살렸던 민도현, 차가운 총탄 속에서도 끝까지 언론망을 지켜냈던 서연, 캔버스 위에 자유의 빛을 피워낸 채린,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태호와 지혜, 영훈이까지.

 

그들의 희생과 용기가 없었다면, 오늘 이 마당에 핀 채송화도,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된장찌개의 온기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진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강정호가 가만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들의 손등을 덮었다.

 

"우진아."

 

"네, 아버지."

 

"기억하되, 얽매이지 마라."

 

강정호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깊었다.

 

"우리가 치러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 대가의 목적은 과거를 곱씹으며 슬퍼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한 숟가락의 밥과 어머니의 미소를 온전히 누리기 위함이었단다. 네가 행복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 궤도에서 벗어난 모든 이들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헌사다."

 

우진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아버지. 잊지 않을게요. 하지만 슬퍼하지도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말없이 우진의 밥공기에 잘 익은 김치 한 조각을 올려놓아 주었다.

 

그 손길에는 아무런 말보다 깊은 위로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6. 마당에 피어난 자유

 

식사를 마치고 찻상을 물린 뒤, 어머니는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아직 심지 못한 몇 포기의 꽃 모종이 그늘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사택 툇마루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마당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한낮을 지나 오후로 접어드는 햇살이 마당 가득 황금빛으로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낡은 라디오를 마루 끝에 틀어두고 있었다.

 

주파수가 약간 흔들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 나왔지만, 흘러나오는 옛 가요의 선율은 한없이 정겨웠다.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평화로운 음악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앵커의 건조하고 긴박한 속보도, 주가 폭락이나 대형 참사를 알리는 인위적인 조작 방송도 없었다.

 

그저 시골 장터의 날씨 이야기, 어느 청취자가 보낸 소박한 사연,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는 따뜻한 멜로디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어머니는 라디오 노랫가락을 나직하게 흥얼거리며 꽃을 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우진은 품속에서 낡은 가죽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상도동 작업실에서 테헤란로 생태 공원 쉼터를 구상하며 그리던 스케치북이었다.

 

백 년 된 벼락 맞은 참나무를 중심 기둥으로 삼고,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싸 안는 비대칭 원목 벤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우진은 연필을 쥐고 도면 한구석에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다.

 

채린의 전시회에서 보았던 그 거침없고 자유로운 붓 터치, 인사동 골목길을 비추던 다채로운 빛의 기억들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우진은 쉼터 처마의 외곽선을 반듯한 직선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가는 길처럼 부드러운 유선형 곡선으로 다듬었다.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흙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쉼터 아래 머무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이 네모난 틀에 갇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무한한 지평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그리고 처마 끝자락,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손을 뻗어 만지게 될 참나무 기둥의 중심부에 작은 메모를 적어 넣었다.

 

[상처 입은 자리마다 꽃이 피어나리라.]

 

연필을 굴리던 우진의 시선이 다시 마당의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어머니는 마지막 패랭이꽃 모종을 화단 구석에 심고는, 만족스러운 듯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는 어머니의 얼굴에, 티 없이 맑고 환한 웃음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것은 우진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온전한 안식의 미소였다.

 

과거의 거짓말과 공포, 남편을 잃어버렸던 원망, 아들의 상처를 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모든 비극의 족쇄가 완벽하게 녹아내린 자리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미소.

 

"우진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어머니가 손짓하며 우진을 불렀다.

 

우진은 스케치북을 마루에 내려놓고 마당으로 걸어 내려갔다.

 

어머니가 가리킨 화단 흙더미 곁,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거친 돌 틈새에서 파란 이끼를 뚫고 솟아오른 아주 작은 들풀 새싹 하나가 보였다.

 

누가 씨를 뿌린 것도, 가꾼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우연히 돌 틈에 자리를 잡은 이름 모를 잡초였다.

 

"참 신기하지?"

 

어머니가 그 작은 싹을 애정 어린 눈길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부러 심은 꽃들도 예쁘지만, 이렇게 제 힘으로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온 풀잎이 더 대견해 보이는구나. 내일 비가 올지, 가뭄이 들지 아무도 모르는데도…… 그저 햇볕이 드니까 온 힘을 다해 잎을 틔우잖니."

 

우진은 어머니의 곁에 나란히 서서 그 작은 풀잎을 응시했다.

 

머리 위에 아무런 궤도도 배정받지 못한 채, 오직 대지의 생명력만으로 싹을 틔운 작은 존재.

 

어쩌면 인간의 삶도 저 들풀과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시스템이 정해준 안전한 온실 속 네모난 화분에서 벗어나, 거친 비바람과 메마른 가뭄을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불확실한 들판.

 

그 들판은 때로 두렵고 위태롭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부신 생명력을 뿜어내는 기적의 공간이었다.

 

"네, 엄마. 정말 대견하네요."

 

우진이 어머니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품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어머니의 몸에서 풍겨오는 흙냄새와 따스한 햇볕 냄새가 우진의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소나무 숲을 흔들며 불어왔다.

 

화단의 꽃들이 일제히 꽃잎을 파르르 떨며 바람을 맞이했고, 툇마루에 앉은 아버지는 연필을 쥔 채 마당의 두 모자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 이상의 악몽은 없었다.

 

정해진 각본도,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던 차가운 알고리즘도 영원히 사라진 세상.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흙을 쥐는 손의 온기, 그리고 내일을 향해 피어나는 꽃잎만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진은 눈을 감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깊게 들이마셨다.

 

완전한 자유의 평화가, 마당 가득 흐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