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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화

추적의 시작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검은 육면체의 그림자

 

사위가 얼어붙은 듯한 정적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역삼역 뒷골목의 막다른 벽면 위로, 낡은 수은등 불빛마저 삼켜버린 남자의 실루엣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강우진의 시야 한가운데, 남자의 정수리 위 약 10cm 상공에 떠 있는 형상이 선명하게 맺혔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평면의 도형들이 아니었다.

 

완벽한 비례를 갖춘 칠흑 같은 3차원의 검은 육면체(Black Cube).

 

육면체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는 식별 불가능한 미세한 이진수 코드와 기하학적 수식들이 형광빛 잔상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수리 위 큐브의 상단 중심부에서 시작된 굵은 암흑의 회선 하나가, 서울 밤하늘의 먹구름 너머 보이지 않는 허공의 정점을 향해 수직으로 팽팽하게 뻗어 올라가 있었다.

 

"미등록 프로토타입. 식별 코드 K-07."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성대를 울려 나오는 인간의 음성이라기보다, 정교하게 합성된 기계음의 파동에 가까웠다.

 

감정의 기복 따위는 티끌만큼도 섞여 있지 않은 서늘한 음향.

 

"15년간의 장기 오프라인 상태를 종료하고 궤도에 재진입한 것을 확인."

 

남자가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자, 젖어 있던 골목 바닥의 물웅덩이가 기괴하게 떨리며 동심원을 그렸다.

 

"보존 절차에 따라 회수 작업을 개시한다. 불필요한 저항은 좌표 오차를 키울 뿐이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등 뒤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벽돌 담벼락이었다.

 

손안에 쥐고 있던 낡은 메모지 하나가 축축한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방금 전 윤채린이 도주하며 떨어뜨리고 간 종이쪽지.

 

그 위에는 부친 강정호의 이름과 'Node-0',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Node-1 : K-07'이라는 식별 기호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놈들이…… 내 아버지를 코어에 집어넣었다고?'

 

의문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가 찢어지는 듯한 격통을 뿜어냈다.

 

머릿속 깊은 곳, 시신경의 뿌리가 타들어 가는 감각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2단계 심층 분석이 강제로 켜지고 있어…….'

 

우진은 이를 악물고 남자의 정수리 위 육면체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흉터가 욱신거리며 맥박에 맞춰 피를 뿜어낼 것만 같았지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육면체의 회전 주기와 데이터 밀도가 우진의 망막에 잔혹할 정도로 선명하게 해체되어 들어왔다.

 

회전 속도 초당 12회.

 

표면을 흐르는 코드의 갱신 주기는 0.05초.

 

그리고 그 육면체 바깥쪽으로, 골목 전체를 압도하며 사방의 공간을 조여오는 보이지 않는 파동의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편의점 점주 김 씨나 박민재 팀장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던 조잡한 검은 세모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완벽한 통제의 결정체였다.

 

"K-07. 시신경 부하율 68%. 안압 상승 확인. 생체 신호가 불안정하다."

 

감시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코트 안쪽에서 길쭉한 금속 원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항을 멈추고 시스템으로 복귀하라."

 

2. 사각지대의 탈출

 

금속 원통의 끝에서 파란색 스파크가 튀는 순간, 우진의 시야에 기묘한 현상이 포착되었다.

 

감시관의 발밑, 그리고 골목 양쪽 벽면을 따라 촘촘하게 깔려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형 격자망(Grid)에 미세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균일하던 격자선의 간격이, 우진의 발치 부근에서 둥글게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동그라미의 척력……!'

 

방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담을 넘어 도주했던 윤채린의 흔적이었다.

 

은빛 동그라미가 남기고 간 잔류 파동이, 감시관이 펼쳐놓은 사각형 통제망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골목 구석의 배수관 뒤편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스템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완전한 사각지대.

 

"회수 절차를 강제 집행한다."

 

감시관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인간의 관절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각진 궤적이었다.

 

찰나의 순간, 우진은 몸을 왼쪽으로 비틀며 바닥을 굴렀다.

 

쾅!

 

감시관의 손에 들린 금속 원통이 우진이 서 있던 벽돌담을 강타했다.

 

폭음과 함께 붉은 벽돌이 모래알처럼 바스러져 튀었고, 콘크리트 파편이 우진의 뺨을 스치며 날카로운 생채기를 냈다.

 

타인의 궤도를 손쉽게 비틀어버리는 힘이 물리적 파괴력으로 치환된 끔찍한 위력이었다.

 

우진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윤채린의 은빛 파동이 남아 있는 좁은 틈바구니로 몸을 던졌다.

 

빌딩과 빌딩 사이, 어른 한 명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새에 쌓여 있던 낡은 철제 배전반과 폐목재들이 우진의 어깨를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다.

 

찌르르르!

 

배수관 뒤편으로 파고들자마자, 우진의 귓가를 찢을 듯 울리던 고주파의 이명과 관자놀이의 통증이 기적처럼 잦아들었다.

 

시스템의 격자가 닿지 않는 공간.

 

궤도의 족쇄가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좌표 신호 이탈. K-07의 생체 파동이 규격 외 굴절 영역으로 진입."

 

등 뒤에서 감시관의 낮게 깔린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조금 전처럼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라, 수족관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좁고 눅눅한 틈새를 기어가듯 빠져나오자, 눈앞에 역삼동 이면도로의 환한 식당가 뒷골목이 나타났다.

 

삼겹살을 굽는 연기와 취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배달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정수리 위에는 저마다 평온하고 안정된 백색 네모(□)들이 질서정연하게 떠올라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세계였다.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인파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수십 개의 백색 네모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군집의 파동 속에 자신의 존재를 묻어버리듯, 빠른 걸음으로 대로변을 향해 걸어 나갔다.

 

등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두운 골목 어귀에 검은 육면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진은 알고 있었다.

 

놈들은 놓친 것이 아니다.

 

단지 신호가 일시적으로 교란되었을 뿐, 언제든 서울 전체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통제망을 통해 자신을 다시 찾아낼 터였다.

 

3. 젖은 메모와 남겨진 암호

 

우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테헤란로의 한 허름한 24시간 무인 카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거친 숨을 고르며 떨리는 손으로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잡힌 종이쪽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윤채린이 떨어뜨리고 간 낡은 메모지.

 

물기와 땀에 젖어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은 여전히 또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가장 윗줄의 굵은 알파벳에 멎었다.

 

'N.P (Nemo Project)'

 

네모 프로젝트.

 

지하철에서 보았던 3분 빠른 사망 속보, 박민재 팀장의 등에 매달려 있던 검은 세모, 편의점 점주 김 씨의 삶을 난도질한 큐브 네트웍스, 그리고 방금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검은 육면체의 감시관.

 

이 모든 비극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 세력의 정식 명칭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서늘한 기록들.

 

'Core Structure & Nodes'

 

'Node-0 : 강정호 (Kang Jeong-ho) / 2011.08.19 흡수 및 시스템 코어 편입 완료.'

 

'Node-1 : K-07 (강우진, Kang Woo-jin) / 미등록 프로토타입. 칩 강제 탈루 개체. 추적 지속.'

 

활자들이 우진의 망막을 송곳처럼 후벼 팠다.

 

'흡수 및 시스템 코어 편입 완료?'

 

우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15년 전, 열일곱 살이던 해의 늦여름.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아버지 강정호.

 

경찰은 단순 가출 및 실종으로 처리했고,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가장이 빚을 지고 야반도주했다는 차가운 낙인만이 찍혔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단순히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이 기괴한 통제 시스템의 'Node-0'이라는 이름으로 코어에 편입되었다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버지."

 

우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진 4cm가량의 흉터.

 

손가락 끝에 닿는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피부 조직 아래에서, 지금도 보이지 않는 맥박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17세 이전의 기억이 하얗게 지워진 채,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텅 비어 있던 자신의 과거.

 

윤채린의 절규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 흉터…… 관자놀이 칩을 강제로 뽑아낸 자국이잖아! 아저씨가 바로 그 15년 전 도망친 프로토타입 K-07이야!'

 

자신이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시스템의 실험 대상이었고, 관자놀이에 궤도 제어 칩을 박아 넣은 채 사육되던 규격 외 개체였다.

 

누군가 그 칩을 억지로 째서 뽑아냈기에 유년기의 기억이 모조리 포맷되었고, 영구적인 편두통이라는 신체적 결손이 남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서 칩을 뽑아내고 날 도망치게 만든 건 누구지?'

 

15년 전 그날, 연구실에서 사라진 아버지 강정호.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둔 낡은 연구 노트 속에 적혀 있던 모식도와 수식들.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의 끔찍한 가설을 향해 맞춰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스템의 설계자였거나, 혹은 시스템에 맞서다 가장 먼저 그 거대한 괴물에게 집어삼켜진 희생자였다.

 

우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시계는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5년 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아버지가 사라지던 그 마지막 밤의 조각을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

 

화면 속 저장된 번호 목록 중, 오랫동안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이름 하나가 차갑게 빛났다.

 

[어머니]

 

4. 야간 통화의 서늘함

 

통화 버튼을 누르자 규칙적인 신호음이 적막한 카페 테이블 위에 울려 퍼졌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마치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통화가 연결되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수화기 너머로 거칠고 불안정한 숨소리가 넘어왔다.

 

"……우진이니?"

 

갈라지고 메마른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에 걸려 온 전화임에도, 잠에서 막 깬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네, 어머니.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주무시고 계셨어요?"

 

우진은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아니다. 안 자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 생긴 거냐? 다친 덴 없고?"

 

쏟아지는 질문 속에는 아들에 대한 단순한 걱정이라기엔 지나치게 과민한 신경증적 불안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손톱을 물어뜯거나 옷자락을 쥐어뜯는 듯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우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품속의 젖은 메모지를 응시하며 입을 뗐다.

 

"어머니.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뭘 말이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단숨에 굳어졌다.

 

"아버지 이야기예요."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수화기 너머의 호흡이 뚝 멎었다.

 

몇 초간의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흐르고, 이내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우진의 고막을 찔렀다.

 

"갑자기 그 인간 이야기는 왜 꺼내? 내가 몇 번을 말했니! 15년 전에 우리 다 버리고 야반도주한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이제 와서 들춰!"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의 이름 석 자만 나오면 어머니는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를 지르며 화제를 돌리거나 통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예전의 우진이라면 어머니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사과하고 물러섰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목숨이 걸린 궤도의 추적이 시작되었고, 자신은 이미 시스템의 타깃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실종되던 날 밤…… 제가 병원에 있었나요?"

 

우진이 차분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물었다.

 

"제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는 이 흉터 말이에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찢어진 상처를 꿰맨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 그래!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서 응급실 가서 꿰맨 흉터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황과 경악, 그리고 감추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은 비밀을 들킨 사람 특유의 거친 파열음.

 

"그 상처, 넘어져서 찢어진 자국이 아니에요."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두개골을 정밀하게 절개하고, 시신경 부근에 박혀 있던 이물질을 강제로 끄집어낸 수술 자국입니다. 메스로 그어낸 흔적이에요."

 

"……!"

 

수화기 너머에서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어머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가 일하던 곳이 대체 어디였습니까? '네모 프로젝트'라는 게 대체 뭐예요? 아버지가 정말 우릴 버리고 도망친 게 맞습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것은, 어머니의 오열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악에 받친 비명이었다.

 

"잊어! 당장 잊으라고 몇 번을 말해! 그 빌어먹을 인간은 널 버린 거야! 널 괴물로 만들고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거라고!"

 

우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괴물?'

 

"어머니, 지금 뭐라고……."

 

"그 인간이 널 실험실에 처넣었어! 네 머리에 그 징그러운 쇳조각을 박아 넣은 것도 네 애비라는 작자야! 아버지는 널 버린 거다! 널 팔아넘긴 거라고! 다시는 그 인간 찾지 마! 파헤치지 마! 그러다 너 진짜 죽어, 우진아!"

 

귓전을 찢을 듯 울부짖던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주워 담지 못해 패닉에 빠진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뚜- 뚜- 뚜-.

 

끊어진 신호음만이 메마르게 귓가를 때렸다.

 

우진은 스마트폰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

 

'아버지는 널 버린 거다. 널 팔아넘긴 거라고.'

 

비정상적으로 흥분하며 쏟아내던 그 말은, 진실을 고백하는 어머니의 한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주입당한 대사를 필사적으로 읊어대는 꼭두각시의 비명처럼 들렸다.

 

5. 모순된 기억의 퍼즐

 

우진은 스마트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차가운 탁자 위로 형광등의 백색 조명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머니의 거짓말.

 

그 광기 어린 반응은 역설적으로 우진에게 하나의 확신을 안겨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을 실험체로 팔아넘기고 도망친 파렴치한 인간이었다면, 어머니의 반응은 배신감에 찬 원망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겨 있던 것은 원망이 아니라 '공포'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찢어놓을까 봐,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난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벼락같은 파멸이 닥쳐올까 봐 두려워하는 자의 처절한 비명.

 

'어머니 역시 감시받고 있다.'

 

우진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아버지 강정호의 유품인 하드커버 연구 노트의 문장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확률로 움직이지 않는다.

 

거대한 항상성 네트워크가 인간의 선택과 파멸을 사전에 계산하고 강제한다.]

 

[개별 노드의 궤도를 수정하려 들지 마라.

 

인과율의 에너지는 보존되며, 시스템은 즉각 강제 덮어쓰기를 가동한다.]

 

[유일한 길은…… 격자의 근원인 중앙 코어를 찾아내 파괴하는 것뿐이다.]

 

아버지가 남긴 수식과 도표들.

 

그것은 자식을 괴물로 만들고 도망친 미치광이의 기록이 아니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짓눌려 가면서도, 언젠가 진실을 마주할 누군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남겨둔 탈출의 지도였다.

 

"Node-0……."

 

아버지는 시스템의 최초 설계자였거나, 혹은 시스템에 대항하다 육신과 의식을 통째로 코어에 빼앗긴 희생양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칩을 이식당했던 프로토타입 K-07.

 

15년 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행한 선택은 자식을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자식의 머릿속에서 통제 칩을 뽑아내어 시스템의 격자망 바깥으로 던져버린 것이었으리라.

 

그 대가로 아버지는 코어에 흡수되었고, 어머니는 침묵을 강요당한 채 '아버지는 널 버렸다'는 거짓 각본을 15년간 읊조리며 살아온 것이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번의 통증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와 결의의 신호였다.

 

"피할 수 없어."

 

시스템은 이미 자신을 찾아냈다.

 

감시관이 역삼역 뒷골목에 나타났고, 신호 동기화는 이미 완료 단계에 이르렀다.

 

숨는다고 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백색 네모의 안락한 노예로 살아가던 '태성C&I 기획2팀 강우진 대리'의 삶은 어젯밤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아버지의 흔적을 되찾기 위해서는 15년 전 실종 사건의 진실을 바닥부터 다시 파헤쳐야 했다.

 

우진은 스마트폰의 웹 브라우저를 켰다.

 

검색창에 '강정호', '2011년 실종', '인공신경망 뇌과학'이라는 키워드를 차례로 입력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결과는 무미건조했다.

 

15년 전의 지역 신문 단신 기사 한 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라는 404 오류 메시지뿐이었다.

 

시스템이 언론과 포털 사이트의 기록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워버린 탓이었다.

 

'공식적인 데이터망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제도권의 전산망을 벗어난 기록, 시스템의 검열을 피해 아버지를 추적했던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필요했다.

 

그때, 우진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6. 새벽의 결의

 

15년 전,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당시 유일하게 의문을 품고 집 주변을 서성거리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고교 동창이자 교지편집부에서 함께 활동하며 언론인을 꿈꾸던 동갑내기 친구, 한서연.

 

경찰이 단순 가출로 종결지으려 할 때, 그녀는 유일하게 아버지 연구실의 폐기 문서들을 뒤지며 '단순 실종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었다.

 

비록 취재는 윗선의 압력으로 무산되었고, 이후 그녀는 대형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가 되어 멀어졌지만 말이다.

 

우진은 연락처 목록을 뒤져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한서연 기자'의 번호를 찾아냈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고, 감시관들이 통신망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날이 밝는 대로, 직접 발로 뛰어 접촉해야 했다.

 

우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머니 속의 N.P 메모를 가슴 안쪽 포켓 깊숙이 갈무리했다.

 

무인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테헤란로의 차가운 새벽 공기 사이를 가르는 첫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격자망이 도시 전체를 사각형의 감옥처럼 옥죄고 있는 풍경이 우진의 눈앞에 선명하게 겹쳐 보였다.

 

"기다려 주십시오, 아버지."

 

우진은 옷깃을 여미며 카페 문을 열고 새벽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15년 동안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을 열기 위한, 목숨을 건 추적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