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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8화

오래된 사진첩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묵은 상자의 먼지

 

아침부터 불어온 바람에선 옅은 흙냄새와 함께 바싹 마른 나무 껍질 향이 섞여 풍겼다.

 

상도동 147번지 목공 작업실의 나무 덧창을 밀어 올리자, 이른 초여름의 청량한 햇살이 길게 바닥을 훑고 들어왔다.

 

어젯밤 늦게까지 대패질을 했던 작업대 위로 대팻밥들이 노란 곱슬머리처럼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강우진은 양손을 털어내며 작업실 한쪽에 놓인 낡은 철제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동작구 골목길의 낡은 기름집을 손수 뜯어고칠 때 구석에 밀어두었던 이삿짐 상자들이 벽면을 따라 층층이 쌓여 있었다.

 

테이프가 누렇게 바래고 모서리가 찌그러진 갈색 박스 하나가 유독 눈에 밟혔다.

 

어머니가 지난주 제천으로 내려가시기 전, 짐을 부치며 상도동 작업실 한쪽에 두고 간 세간살이 상자였다.

 

'우진아, 네 어릴 때 쓰던 일기장이랑 잡동사니 몇 개 모아둔 박스다. 시간 날 때 열어보고 버릴 건 버려라.'

 

어머니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우진은 면장갑을 벗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무릎을 굽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상자 뚜껑을 봉하고 있던 갈색 박스테이프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메말라 바스러졌다.

 

손끝으로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뜯어내자, 묵은 종이와 나프탈렌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상자 안에는 우진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썼던 삐뚤빼뚤한 그림일기장 몇 권과, 플라스틱 자, 몽당연필들이 담긴 깡통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 깊숙한 곳에, 두꺼운 모직 천으로 정성껏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물건이 묵직하게 손끝에 닿았다.

 

천을 걷어내자 짙은 밤색 가죽 표지의 앨범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표지 모서리는 손때가 타 닳아 있었고, 금박으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던 '추억'이라는 두 글자는 반쯤 지워져 있었다.

 

우진의 손가락이 가죽 표지의 거친 질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과거의 그에게 '17세 이전'이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관자놀이에 4센티미터의 흉터를 남긴 채 뇌간을 짓누르던 생체 칩과 신경 궤도 절제술.

 

시스템이 자신의 궤도를 통제하기 위해 강제로 포맷해 버렸던 그 새하얀 기억의 공백.

 

그 시절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시신경을 바늘로 후벼 파는 듯한 편두통과 함께 찾아오던 서늘한 백색 암전.

 

하지만 지금, 그의 관자놀이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다.

 

시야를 옥죄던 푸른색 궤적 잔상도,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감시하듯 내리누르던 기하학적 도형들도 허공 어디에도 없었다.

 

머릿속을 찌르던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아침 햇살의 따스한 미온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사진첩의 첫 장을 넘겼다.

 

2. 박제된 시간의 온기

 

비닐 필름이 쩍 하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들춰졌다.

 

흑백에 가까운 빛바랜 컬러사진들이 투명한 필름 아래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첫 장에는 갓난아기 시절의 우진이 흰 배냇저고리를 입고 누워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우진이 백일상을 받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있는 사진이, 그다음 장에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며 마당의 강아지를 쫓아가는 사진이 이어졌다.

 

사진 속 풍경들은 분명 우진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의 머릿속 기억 창고에는 온전한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은 장면들이었다.

 

단지 '언젠가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메마른 텍스트로만 짐작하던 박제된 조각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사진 밑에 파란색 만년필로 정갈하게 적힌 어머니의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이가 처음으로 혼자 일어선 날. 쿵 넘어졌는데도 울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우진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른 날. 정호 씨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와 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다.'

 

한 줄 한 줄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짧은 메모들.

 

그 문장들 사이에 배어 있는 온기가, 지워진 기억의 텅 빈 방으로 가만히 번져 들어왔다.

 

머리로 기억하지 못해도, 가슴속 어딘가에 이 다정한 시간들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자신이 그 삭막한 통제의 지옥 속에서도 끝내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리라.

 

우진의 손길이 앨범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유독 가장자리가 헤진 사진 한 장 앞에서 멈추어 섰다.

 

우진이 일곱 살 되던 해의 늦가을에 찍힌 사진이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흐드러지게 깔린 공원 벤치.

 

그 한가운데에 체크무늬 멜빵바지를 입은 어린 우진이 서 있었다.

 

앞니가 두 개 빠진 채로 양손으로 브이(V)를 그리며 눈이 사라질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

 

그 아이의 왼쪽에는 젊고 단아한 얼굴의 어머니가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쥔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오른쪽에는, 아직 휠체어에 앉지 않았던 시절의 아버지 강정호가 서 있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빛을 빛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듯 아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는 젊은 날의 아버지.

 

세 사람의 얼굴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가을 햇살.

 

그곳에는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었다.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 인간의 의지를 옭아매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며 찰나의 행복을 나누는 세 사람의 살아 숨 쉬는 표정만이 박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아버지의 친필로 적힌 글귀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 우진이의 일곱 번째 가을. 어떤 규격에도 갇히지 말고, 너만의 하늘을 날아가렴.'

 

우진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15년 전, 아버지는 연구소의 끔찍한 음모를 눈치채고 어린 아들의 머릿속에서 제어 칩을 뽑아냈다.

 

자신의 척수가 으스러지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15년 동안 지하 7층 차폐 챔버 속에 생체 프로세서로 갇혀 도시 전체의 파멸적 엔트로피를 온몸으로 대신 받아내면서도,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것은 바로 이 웃음이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정해진 각본의 노예가 아닌,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을 돌려주기 위해서.

 

3. 옹이진 나무와 유리 액자

 

우진은 조심스럽게 사진의 네 귀퉁이를 필름에서 떼어냈다.

 

오랜 세월 필름에 눌려 있던 인화지는 빳빳했지만 부드러운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가슴 포켓에 소중히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실 한구석에는 어제 공모전에서 '규격 표준화 미달'로 탈락했던 호두나무 비대칭 다이닝 테이블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목재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중 유독 결이 촘촘하고 단단한 참나무 원목 토막 하나가 우진의 시선을 끌었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직사각형 목재.

 

그 한가운데에는 짙은 밤색의 거친 옹이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무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거센 비바람을 견디고, 부러진 가지의 상처를 스스로 감싸 안으며 단단하게 굳어진 흔적.

 

세상의 기준으로는 흠집이고 불량이었지만, 우진의 눈에는 세상 그 어떤 매끄러운 목재보다 깊고 숭고한 결을 지닌 보석처럼 보였다.

 

우진은 앞치마를 둘러매고 작업대 앞에 섰다.

 

그는 연필을 쥐고 참나무 토막 위에 액자의 외곽선을 그렸다.

 

기계로 찍어낸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었다.

 

나무 본연의 나이테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비대칭의 테두리.

 

우진은 조각도와 대패를 집어 들었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쇠칼이 단단한 참나무를 파고들며 맑고 고운 마찰음을 냈다.

 

대팻날을 스칠 때마다 참나무 특유의 그윽한 피톤치드 향이 작업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우진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과거 2단계 '심층 분석'이나 4단계 '과거 추적'을 쓸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오직 손끝에 닿는 나무의 결, 옹이의 단단함, 칼날의 미세한 떨림을 맨살의 감각으로 느끼며 천천히 형태를 다듬어 나갔다.

 

사진이 들어갈 자리를 정밀하게 파내고, 모서리는 고운 사포로 문질러 둥글게 굴렸다.

 

거칠었던 참나무 표면이 우진의 손길을 거치며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윤기를 띠기 시작했다.

 

가운데 박힌 짙은 옹이는 투명한 천연 오일을 듬뿍 먹이자, 마치 숲속의 깊은 호수처럼 맑고 영롱한 갈색빛을 뿜어냈다.

 

상처가 흉터로 남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중심축이 되는 과정.

 

우진은 지난주 상도역 철물점에서 사다 두었던 3밀리미터 두께의 투명 강화유리를 크기에 맞게 재단했다.

 

다이아몬드 유리칼로 선을 긋고 톡 치자, 맑은 소리와 함께 유리가 매끄럽게 갈라졌다.

 

우진은 가슴 포켓에서 꺼낸 낡은 가족사진의 먼지를 입으로 조심스럽게 후 불어 털어냈다.

 

그리고 정성껏 깎아 만든 참나무 액자 홈 속에 사진을 밀어 넣었다.

 

그 위로 투명한 유리를 덮고, 뒷면에 황동 고정 핀을 꼼꼼하게 채웠다.

 

단단한 참나무의 옹이와 빛바랜 사진 속 세 사람의 웃는 얼굴이 완벽하게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졌다.

 

액자를 책상 위에 비스듬히 세워두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아침 햇살이 유리 표면에 부딪혀 투명한 금빛으로 부서졌다.

 

우진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액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15년 동안 잃어버렸던 그의 유년기가, 마침내 차가운 결손의 상처를 벗고 따스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착한 순간이었다.

 

4. 골목길의 발걸음

 

"계세요? 강 목수님!"

 

작업실 덧문 밖에서 맑고 시원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헐렁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한서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단팥빵 봉투와 테이크아웃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문 열려 있었네요. 또 아침부터 톱밥 먼지 뒤집어쓰고 계셨어요?"

 

서연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웃으며 작업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커피의 쌉싸름한 향과 달콤한 빵 냄새가 작업실의 나무 냄새와 기분 좋게 섞였다.

 

"어제 공모전 떨어졌다고 속상해서 앓아누웠을까 봐 위문 왔더니, 얼굴이 아주 보름달처럼 훤하네요."

 

서연이 종이컵 하나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으며 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진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앓아눕긴요. 어제 서연 씨랑 맥주 마시면서 다 털어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쓰렸을 거 아니에요. 대기업에선 날고기던 기획자였는데, 가구 공모전에선 서류도 아니고 1차 실물 심사에서 규격 미달로 똑 떨어졌으니."

 

"아닙니다. 정말로 시원했어요. 내 맘대로 만들고, 내 맘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홀가분한지 서연 씨는 모를 겁니다."

 

서연이 픽 웃으며 고개를레 흔들었다.

 

"알다마다요. 오죽하면 제가 책 제목을 《선택할 권리》라고 지었겠어요?"

 

그러다 서연의 시선이 책상 한가운데 정갈하게 놓여 있는 참나무 액자로 향했다.

 

자연스러운 곡선 테두리 한가운데 옹이가 박힌, 방금 완성된 것이 분명한 새 액자였다.

 

그 안에 담긴 빛바랜 사진을 본 서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어…… 이거."

 

서연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액자 속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우진, 부드러운 눈빛의 어머니, 그리고 두 다리로 당당하게 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강정호 박사.

 

서연의 손끝이 유리 표면을 아주 조심스럽게 스쳤다.

 

"강정호 박사님의 젊은 시절이네요…… 박사님이 두 발로 서 계신 모습은 저도 처음 봐요. 15년 전 화재 기사 자료 사진에서만 아주 흐릿하게 뵌 적이 있었는데."

 

서연의 목소리에 짙은 경외와 먹먹함이 배어 있었다.

 

"어머니가 두고 가신 상자에서 찾았습니다. 15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얼굴이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슴이 먼저 기억하더군요."

 

우진이 액자 곁으로 다가와 서연의 옆에 섰다.

 

"아버지가 참 젊으셨네요. 그리고 우진 씨…… 어릴 때 진짜 개구쟁이였나 봐요. 앞니 다 빠진 것 좀 봐."

 

서연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진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온 동네 담벼락을 다 타고 넘어 다녀서 무릎에 성한 날이 없었답니다."

 

서연은 한참 동안 사진 속 세 사람의 표정을 응시하다가, 액자의 독특한 형태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근데 액자 틀이 정말 예뻐요. 일부러 옹이가 있는 부분을 정중앙에 두신 거죠?"

 

"네. 흠집이라고 잘라내 버리면 그 나무가 비바람을 견뎌낸 시간까지 다 버리는 거니까요. 우리 가족이 지나온 15년도…… 이 옹이 같은 거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진의 담담한 목소리에 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옹이진 상처를 지키기 위해 이 남자가 얼마나 거대한 괴물과 싸워왔는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삼켜왔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사님이 보시면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제천 연구실 책상에 올려두면 딱이겠네요."

 

"안 그래도 오늘 제천에 다녀오려고요. 마침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기도 하고요."

 

우진이 앞치마를 벗어 개어두며 말했다.

 

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진짜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마침 오늘 취재 마감도 다 끝냈고, 제천 공기 쐬러 가고 싶었는데 잘됐다."

 

"서연 씨 바쁘지 않으세요?"

 

"제가 왜 바빠요? 특수본 취재는 이미 후속 기사까지 송고 끝났고, 제 책 2쇄 들어간 기념으로 출판사에서 휴가도 줬단 말이에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기름값만 우진 씨가 내요."

 

씩씩하게 차 키를 흔들어 보이는 서연을 보며, 우진은 거절할 틈도 없이 기분 좋은 헛웃음을 흘렸다.

 

5. 초여름의 고속도로

 

서연의 소형차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영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을 반쯤 내리자 초여름의 싱그러운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을 타고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조수석에 앉은 우진은 무릎 위에 부드러운 융 천으로 감싼 참나무 액자를 소중히 올려두고 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속도는 저마다 달랐다.

 

과거 미러 큐브의 내비게이션 알고리즘이 1초의 오차도 없이 모든 차량의 간격과 속도를 강제로 규격화하던 시절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어떤 차는 천천히 차창 밖 풍경을 즐기며 3차로를 달렸고, 어떤 차는 경쾌하게 깜빡이를 켜며 추월차로로 나아갔다.

 

운전자들의 머리 위에는 당연히 아무런 도형도 떠 있지 않았다.

 

각자의 의지와 선택으로 운전대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차 안 막히니까 정말 좋네요."

 

서연이 핸들을 가볍게 톡톡 치며 말했다.

 

"그러게요. 옛날 같았으면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인 우회 경로'랍시고 좁은 시골길로 차들을 한꺼번에 몰아넣어서 난리가 났을 텐데."

 

"맞아요. 조금 막히면 막히는 대로 라디오 들으면서 기다리고, 길을 잘못 들면 잘못 든 대로 새로운 풍경을 구경하는 게 진짜 여행인데 말이죠."

 

서연이 룸미러로 우진을 힐끔 보며 물었다.

 

"참, 아까 출발하기 전에 복덕방 할머니가 우진 씨한테 묵직한 보따리 하나 건네던데, 그건 뭐예요?"

 

우진이 뒷좌석을 가리키며 웃었다.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오이소박이랑 갓 빻은 들깨가루예요. 제천 부모님 갖다 드리라고 새벽부터 싸 두셨더라고요. 기름집 청년이 효자라면서."

 

"어머, 그 까칠하시던 복덕방 할머니가요? 우진 씨 상도동 골목길 완벽하게 접수했네."

 

"제가 접수한 게 아니라, 할머니가 절 거둬주신 거죠."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연은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였다.

 

스피커에서는 낡은 어쿠스틱 기타 선율과 함께 맑은 포크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는 서툴렀지만, 부르는 이의 진심 어린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노래였다.

 

"이 노래 참 좋네요."

 

우진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푸른 산자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요즘 인디 차트에서 역주행 중인 무명 가수 노래래요. 완벽하게 조율된 기계음이 아니라, 사람 숨소리가 그대로 들려서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아요."

 

서연의 말에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 지워진 세상은 시끄럽고 불완전했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는 그 어떤 기계의 계산식보다 따스했다.

 

6. 제천의 밥상

 

충북 제천의 산골 마을에 들어서자, 공기의 결이 한층 서늘하고 맑아졌다.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비탈길 끝에 낡은 분교 사택을 개조한 목조 단층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당 한쪽에는 장작더미가 소복이 쌓여 있었고, 툇마루 처마 밑에는 옥수수와 시래기가 정갈하게 매달려 있었다.

 

차 소리를 들었는지, 헐렁한 모시 적삼을 입은 어머니가 부엌 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우진아!"

 

어머니의 얼굴에 번진 환한 주름이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났다.

 

차에서 내린 우진은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풍기는 익숙하고 포근한 된장 냄새.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아이고, 바쁠 텐데 뭐 하러 이 먼 데까지 내려왔어…… 어머, 서연 씨도 같이 왔네!"

 

어머니는 뒤이어 내린 서연을 발견하고는 버선발로 뛰어나오듯 반색했다.

 

"기자 양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마침 점심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 왔네, 잘 왔어."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시내에서 떡 케이크 하나 사 왔어요."

 

서연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네자 어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서연의 손을 꼭 쥐었다.

 

우진은 툇마루를 지나 안채 연구실로 향했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은은한 묵향과 흑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창가 쪽 낡은 원목 책상 앞에 아버지 강정호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나 광케이블 같은 디지털 장비는 단 하나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노란 격자무늬 노트와 몽당연필, 지우개 가루, 그리고 손때 묻은 낡은 수동 계산기만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돋보기를 쓴 채 연필로 숫자를 적어 내려가던 아버지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우진이 왔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난번 아산병원에 누워 계실 때보다 훨씬 힘이 붙어 있었다.

 

창백했던 안색에는 건강한 혈색이 돌았고, 눈빛은 깊고 고요한 호수처럼 맑았다.

 

"아버지, 연구 중이셨어요?"

 

우진이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래. 관악산 시절에 관측했던 바람의 이동 경로 데이터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걸로 사람들의 궤도를 맞추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바람이 왜 이 골짜기로 불어오는지 그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재미가 있구나."

 

아버지는 연필을 내려놓으며 사람 좋은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우진은 품에 안고 온 융 천을 천천히 벗겨냈다.

 

그리고 참나무 옹이 액자를 아버지의 책상 위, 손때 묻은 연구 노트 바로 옆에 가만히 세워두었다.

 

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액자로 시선을 내렸다.

 

순간, 아버지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늘 온화하던 아버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진 속,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자신의 젊은 날.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우진과 아내의 얼굴.

 

아버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액자의 참나무 테두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끝이 가운데 박힌 단단한 옹이에 닿았을 때, 아버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혀 안경 렌즈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걸…… 네가 찾아냈구나."

 

"어머니 짐 상자 속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나무를 깎아서 액자를 만들었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거칠어진 손가락으로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자신의 젊은 날을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릴 뿐이었다.

 

15년 동안 어둠 속에서 짊어져야 했던 죄책감과 고통의 세월이, 그 눈물방울과 함께 참나무 옹이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듯했다.

 

"나무 결이…… 아주 단단하고 따뜻하구나. 옹이가 참 곧아."

 

아버지가 젖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 비바람을 견뎌낸 자리라서 가장 단단하대요. 우리 가족처럼요."

 

우진의 말에 아버지는 마침내 참아왔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한 과학자의 미소가 아니라, 마침내 아들에게 온전한 삶을 돌려준 한 아버지의 깊고 평온한 안도의 미소였다.

 

"여보! 우진아! 밥상 다 차렸다. 나와서 식기 전에 어서 들어요!"

 

마당 쪽에서 어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은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마루로 나섰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낸 푸짐한 시골 밥상이 놓여 있었다.

 

복덕방 할머니가 보내준 아삭한 오이소박이와 고소한 들깨탕, 텃밭에서 갓 뜯어온 쌉싸름한 상추와 쌈장,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조기 두 마리.

 

네 사람은 둥근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웃음꽃이 피어났다.

 

서연은 넉살 좋게 어머니의 쌈을 받아먹으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고,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며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마당 너머로 펼쳐진 푸른 소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눈부셨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함께 나누는 밥상은 따뜻했다.

 

7. 무형의 궤도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서연은 어머니의 설거지를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고, 우진은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마당 뒤편 소나무 숲길로 산책을 나섰다.

 

솔잎이 푹신하게 깔린 흙길 위로 휠체어 바퀴가 사각사각 기분 좋은 마찰음을 내며 굴러갔다.

 

키 큰 소나무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부자의 어깨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우진아."

 

앞서가던 아버지가 나지막이 아들을 불렀다.

 

"네, 아버지."

 

"가구 만드는 일은 좀 어떠냐. 네 손으로 직접 나무를 만지는 느낌이."

 

우진은 걸음을 늦추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걸 수치로 재단하고, 타인의 시선과 규격에 맞춰서 보고서를 쓰는 게 일이었는데…… 나무는 거짓말을 안 하더군요. 힘을 주면 주는 대로 깎이고, 결을 거스르면 그대로 거칠어집니다. 내 손으로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게 참 정직하고 편안합니다."

 

아버지는 숲길 너머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참나무 액자를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가운데 둔 그 옹이 말이다."

 

"네."

 

"과거의 나는 세상의 모든 옹이를 결함으로 보았다. 인간의 삶에 닥치는 불행, 실수, 예기치 못한 사고…… 그런 우연의 상처들을 전부 지워버려야 할 버그이자 오차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것들을 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 했다. 그게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정식이라고 믿으면서."

 

아버지의 목소리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지만, 그 끝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네가 만든 액자를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상처와 실수가 없는 삶은…… 아무런 결도 없는 플라스틱 판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바람을 맞고 가지가 부러져 옹이가 박힌 나무만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하고 단단한 무늬를 갖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한없이 따스했다.

 

"너는 이미 나보다 훨씬 뛰어난 학자이자, 훌륭한 인간이 되었구나. 도형을 지우고, 무형(無形)의 결을 스스로 깎아낼 줄 아는 목수가 되었어."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15년 동안 버텨주셨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겁니다."

 

우진은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숲길 끝, 탁 트인 능선 공터에 다다르자 제천의 들판과 굽이치는 능선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국도를 달리는 작은 버스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그 버스가 언제 정류장에 도착할지, 어떤 승객이 타고 내릴지, 오늘 저녁 그들이 어떤 찌개를 끓여 먹을지 그 누구도 사전에 계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세상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불확실하기에 아름답고, 실수할 수 있기에 서로를 용서하며 연대하는 세상.

 

8. 문틈으로 스며든 엽서

 

오후 늦게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서연의 차 안은 갈 때보다 훨씬 고요했다.

 

서연은 피곤했는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만 가볍게 까닥였고, 우진은 조수석에 깊숙이 기대어 차창 밖으로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서산 너머로 번져가는 주황빛과 보랏빛의 그라데이션.

 

하늘을 가로지르던 사각의 전산 격자망이 완전히 사라진 빈 공간에, 자연이 빚어내는 무한한 색채가 거침없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상도동 147번지 골목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린 저녁이었다.

 

서연은 차를 골목 어귀에 세우고 우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덕분에 진짜 힐링하고 왔어요. 어머니 밥상도 너무 맛있었고, 박사님 표정도 잊히질 않네요."

 

"운전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서연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내일 모퉁이 서재에서 커피 한잔해요. 강 목수님 새 평상 벤치 스케치도 구경할 겸!"

 

서연이 생기발랄하게 웃으며 차를 돌려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우진은 서연의 차 꽁무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배웅한 뒤, 몸을 돌려 작업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작업실 앞 원목 벤치 위로 시원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이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려던 찰나였다.

 

그의 시선이 작업실 나무 출입문 틈새 바닥에 멈추어 섰다.

 

문틈 사이로 하얀 종이 한 장이 반쯤 밀려 들어와 있었다.

 

우진은 허리를 굽혀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도톰하고 거친 질감의 고급 수제 엽서였다.

 

앞면에는 낯익은 필체로 '강우진 귀하'라는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진은 엽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아무런 수식도, 경고도, 살기 어린 단어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화사한 수채화 물감으로 정성껏 그려진 작은 그림 한 점이 인쇄되어 있었다.

 

초여름의 푸른 잔디밭 위에 놓인 거친 호두나무 테이블.

 

그리고 그 테이블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제각각 다른 색깔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얼굴 없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림 구석에는 작고 앙증맞은 서명이 적혀 있었다.

 

[Chae-Rin]

 

그리고 그림 하단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짧은 초대 문구가 이어졌다.

 

'아저씨! 저 첫 번째 야외 거리 전시회 해요. 공모전 떨어진 테이블 들고 구경 올래요? 아주 특별한 손님들도 초청했거든요. 이번 주 토요일, 홍대 숲길에서 기다릴게요.'

 

우진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채린이었다.

 

손끝의 척력이 사라져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붓을 쥐겠다던 은빛 동그라미의 소녀가, 마침내 자신만의 도화지 위에 첫 번째 세상을 펼쳐 보인 것이다.

 

우진은 엽서를 가슴 포켓에 소중히 넣었다.

 

자신이 실패했던 호두나무 비대칭 테이블이, 누군가의 캔버스 위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무대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진은 열쇠를 돌려 작업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작업실 안으로 상쾌한 밤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작업대로 다가가, 어제 스케치북에 그리다 말았던 이웃들을 위한 평상형 벤치 도면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내일은 어떤 나무를 깎게 될까.

 

어떤 우연이 이 골목길을 찾아올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내일이,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