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백지
1. 지하 40미터의 장벽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을 빠져나와 세종대로를 향해 내달리는 강우진의 폐부로 차가운 아스팔트 열기가 밀려들었다.
해질 무렵의 붉은 노을이 광화문 프레스센터의 육중한 화강암 외벽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도로변은 이미 경찰 바리케이드와 대형 방패를 든 기동대 행렬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경광등의 붉고 푸른 섬광이 사방을 어지럽게 훑었고,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다급한 비명 같은 지령들이 소음과 뒤섞여 공기를 짓눌렀다.
"전 대원, 환기구 4번 라인에서 후퇴하라! 내부 충격파 전도율 80% 돌파! 접근 불가다!"
기동대원 서넛이 얼굴에 피를 흘리며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총알이나 파편에 맞은 상처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압축된 기압의 철퇴에 얻어맞은 것처럼, 흉갑이 움푹 찌그러지고 모세혈관이 터져 나온 처참한 몰골이었다.
"우진 씨!"
바리케이드 뒤편, 샛길 구석에서 검은 재킷을 입은 한서연이 달려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방수 코팅된 광화문 지하 공동구 단면도가 쥐여 있었고,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우진을 마주한 서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정말 혼자 들어갈 생각이에요? 방금 특공대 한 개 분대가 강제 진입을 시도했다가 30미터도 못 가고 전멸할 뻔했어요. 내부에서 공기가 액체처럼 뭉쳐서 날아온대요. 계측기 수치가 전부 레드 존이에요. 15만 볼트 전력이 이미 메인 축전 유닛에 직결됐어요!"
서연이 내민 단면도 위에는 광화문 사거리 지하 40미터 깊이에 위치한 거대한 원형 공동구가 붉은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15년 전 넥스트 큐브의 전신 연구소가 슬러지를 은밀히 흘려보내던 배수로와 얽힌 그곳은, 지금 거대한 인과율의 화약고로 변해 있었다.
우진은 서연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것은 차가운 티타늄 파편과 작은 조각도, 그리고 상도동 작업실에서 세 도형을 모두 지워내고 챙겨온 닳아빠진 하얀 지우개 하나뿐이었다.
머리 위를 스캔하던 감각 왜곡 인터페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청색의 탄도 궤적도, 적색의 파멸 세모도 망막에 비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직 맑고 투명한 인간의 망막으로 현실의 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펼쳐놓은 충격파는 총이나 방패를 겨눌수록 더 강하게 튕겨 나옵니다. 외압을 가하면 가할수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더 날카로운 세모를 벼려내는 거죠."
"그럼 어떻게 뚫겠다는 거예요? 우진 씨한테는 이제 몸을 감싸줄 척력도 없잖아요!"
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진을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규격이 부딪치면 파열이 일어납니다. 단단한 것은 더 단단한 것에 부서지죠. 하지만 아무런 형태도 없는 것은 부서질 수 없습니다."
우진은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저녁에 상도동에 오면 할머니가 시원한 오이냉국을 주신다고 했어요. 서연 씨도 같이 가야죠."
가벼운 농담 속에 담긴 바위 같은 확신.
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곧장 몸을 돌려, 자욱한 연무와 매캐한 오존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4번 비상 환기구의 철문을 열어젖혔다.
2. 어둠 속의 이물질
끼이익, 쾅.
두꺼운 방화문이 닫히며 지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수직으로 뚫린 강철 사다리를 타고 지하 40미터를 내려가는 동안, 사방의 벽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우웅, 우웅.
귓전을 긁는 초저주파의 진동.
공기 중에 흩뿌려진 미세한 전류와 결손 엔트로피가 피부를 바늘처럼 찔렀다.
사다리 끝에 발이 닿자, 거대한 콘크리트 원형 터널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발목까지 차오른 정체불명의 냉각수가 검붉은 빛을 반사하며 출렁였다.
저 멀리 터널 끝에서 눈을 찌르는 푸른 백색의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쾅!
전방 100미터 지점에서 공기가 비틀리며 투명한 충격파가 터널 벽을 긁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내벽이 마치 과자 부스러기처럼 분쇄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살인적인 폭압의 중심에, 두 개의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15년 전 오르비스 코어 지하 7층에서 화학적 동면 상태로 봉인되었다가 깨어난 규격 부적합 결손체들.
Subject-01 백도현, 그리고 Subject-03 유진아였다.
백도현은 15만 볼트 순환선 전선이 직결되어 거대한 심장처럼 맥동하는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원통형 기계 장치 표면에는 시퍼런 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고, 백도현의 목덜미와 관자놀이에 박힌 낡은 티타늄 단자에서는 붉은 피와 검은 오일이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왔나 했더니."
백도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축축한 터널에 울렸다.
그의 두 눈은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신경망이 팽창해 관자놀이 핏줄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K-07. 강정호의 아들."
유진아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공기가 일그러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고밀도 압축 파동이 형성되었다.
특수부대원들의 방탄 장구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던 바로 그 충격파였다.
"도현 오빠, 저놈한테는 아무런 힘도 안 느껴져. 칩도, 궤도도, 아무것도 없어. 그냥 껍데기야."
유진아의 서늘한 평가에 백도현이 광기 어린 실소를 터뜨렸다.
"껍데기라. 그래, 껍데기겠지. 혼자서만 구원받은 척, 혼자서만 자유를 찾은 척하며 세상 밖으로 기어 나가 목수 흉내를 내던 배신자 새끼."
백도현이 축전 유닛에서 뛰어내렸다.
첨벙, 물을 튀기며 착지한 그의 전신에서 푸른빛의 인과율 파동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너는 잊었겠지, 강우진. 네 아버지가 우리를 저 차가운 질소 탱크에 처넣고 밸브를 잠글 때 나던 그 쇠 긁는 소리를! 시스템의 완벽한 사각 규격에 맞지 않는 불량품이라며, 15년 동안 산 채로 뇌를 얼려버렸던 그 끔찍한 암흑을!"
백도현의 포효와 함께 터널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축전 유닛의 계기판 바늘이 붉은 한계치를 가리키며 맹렬하게 떨렸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5분.
전압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광화문 일대 지하 암반이 통째로 증발하며 지상의 세종대로가 싱크홀 속으로 무너져 내릴 터였다.
3. 궤도의 망령
"나는 잊지 않았다, 백도현."
우진이 흙탕물을 밟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해서, 오히려 요동치는 터널의 광기를 비현실적으로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네가 작업실 문앞에 남겨두고 간 티타늄 밸브 파편을 보았다. 영하 수십 도의 냉매를 견디던 그 차가운 쇠붙이를 매일 손에 쥐고 살았을 네 고통을 안다."
"입 닥쳐!"
백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콰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며 음속을 초월한 비가시적 충격파가 우진을 향해 직선으로 쇄도했다.
바닥의 물이 좌우로 거대하게 갈라지며 바닥 콘크리트가 파였다.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과거의 우진이었다면 0.3초 전 미래 예측으로 궤적을 읽고 절대 척력으로 굴절시켰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에게는 그런 초인적인 권능이 없었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몸의 힘을 완전히 빼고 충격파가 닿기 직전 그 흐름의 결을 따라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투화아악!
충격파의 가장자리가 우진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꺼운 작업복 외투가 찢겨 나가고 생살이 터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어깨뼈가 부서질 듯한 맹렬한 통증이 뇌간을 강타했다.
"큭..."
우진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의 물속으로 처박혔다.
"우진!"
멀리 환기구 쪽에서 지켜보던 서연의 비명이 터널을 타고 울렸지만,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늘어뜨린 채, 우진은 다시 백도현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백도현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뭐 하는 짓이지? 왜 궤도를 틀지 않지? 왜 능력을 쓰지 않는 거냐! 네놈 머리 위의 도형은 어디로 간 거야!"
백도현의 시야에는 우진의 머리 위에 그 어떤 기하학체도 보이지 않았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는 완전한 공백.
그것은 시스템의 연산식으로도, 인과율의 압축 파동으로도 락온할 수 없는 기괴한 이물질이었다.
"도형은 없다."
우진이 피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도형은 애초에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다. 네모 프로젝트가 우리 뇌간에 억지로 심어둔 감각의 흉터였을 뿐이지."
"거짓말하지 마!"
백도현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정수리 위에서 칠흑 같은 검은 세모(△)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 세모는 파멸을 향해 꺾여 있었고, 허공으로 뻗은 굵은 꼭두각시 줄선이 무너진 오르비스의 잔해와 공명하며 검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세모가 보이지 않나? 이 증오와 파멸의 각도가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세상은 우리를 불량품이라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야. 이 세상을 가장 날카로운 세모로 찢어발겨, 우리와 똑같은 불구덩이에 처넣는 것뿐이다!"
백도현의 절규는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의 울음과도 같았다.
그는 복수를 꿈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상처라는 좁은 방에 갇혀, 그 상처의 형태를 평생 숭배하며 살아온 가련한 조각상에 불과했다.
4. 지우개를 쥔 손
"도현아."
우진이 처음으로 그의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백도현의 신형이 흠칫 굳었다.
우진은 오른손을 외투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꺼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조각도도, 티타늄 파편도 아니었다.
모서리가 까맣게 닳아 둥글어진 작은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였다.
"저게... 뭐지? 폭탄 스위치인가?"
유진아가 경계하며 손끝의 압축 충격파를 다시 끌어올렸다.
하지만 백도현은 멍하니 우진의 손바닥을 응시했다.
아무런 전자 회로도, 기폭 장치도 없는, 문구점에서 백 원이면 살 수 있는 낡은 지우개.
"너는 네 고통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겠지."
우진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이었다.
축전 유닛에서 뿜어져 나오는 15만 볼트의 방전 스파크가 우진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하지만 네가 지금 하려는 건 복수가 아니다. 너를 찌르고 얼어붙게 만들었던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해. 너 스스로를 '파멸의 세모'라는 규격 속에 가두어두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강제로 그 세모의 족쇄를 채우려는 폭력일 뿐이다."
"닥쳐... 닥치라고 했다!"
백도현이 양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터널 내부의 수증기와 물방울들이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빨려 들어가며, 지름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암흑의 인과율 압축 구체가 형성되었다.
광화문 사거리 지상 도로의 아스팔트가 갈라지는 굉음이 천장을 뚫고 들려왔다.
임계점 돌파까지 앞으로 3분.
그 구체가 터지는 순간, 이 지하 공동구는 물론 지상의 모든 건물이 지하로 수직 함몰될 터였다.
"죽어라, 강우진! 너도, 네 아버지가 만든 이 빌어먹을 세상도 전부 부서져 버려!"
백도현이 거대한 파멸의 구체를 우진을 향해 내던졌다.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굉음.
터널 벽면의 방수 타일들이 일제히 유리알처럼 박살 나며 폭풍을 일으켰다.
피할 곳은 없었다.
방어할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의 망막 속에는 방금 전 상도동 작업실에서 마주했던 순백의 켄트지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형태가 있기에 부서지는 것이다.'
'규격이 있기에 증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진은 지우개를 쥔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아무런 이능도, 방화벽도 두르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그 거대한 암흑의 구체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5. 무형(無形)의 포용
콰아아아앙!
세상이 암전되었다.
고막을 찢는 폭음 대신, 우진의 귓가에는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듯한 먹먹한 정적이 찾아왔다.
인과율의 압축 파동이 우진의 전신을 짓이겼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폐 속의 공기가 강제로 쥐어짜여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고였다.
하지만 우진은 밀려나지 않았다.
그는 파동을 튕겨내려 하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가 칠 때 바위는 부서지지만, 물은 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진은 온몸의 힘을 빼고, 백도현이 15년간 응축해 온 고통과 원한의 파동을 자신의 온몸으로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것은 방화벽 백신의 작동이 아니었다.
이능의 척력도 아니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순수한 살과 피의 수용이었다.
지우개를 쥔 우진의 주먹이 암흑의 구체 중심을 꿰뚫었다.
그리고 우진의 피투성이가 된 발이 백도현의 바로 코앞에 멈추어 섰다.
"...어?"
백도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자신의 모든 증오를 담아 던진 궁극의 인과율 구체가, 폭발하지 않고 우진의 몸을 통과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아니,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진의 몸이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백도현의 살의를 아무런 저항 없이 삼켜버린 것이었다.
우진의 뻗은 손이 백도현의 가슴팍에 닿았다.
주먹 속에 쥐여 있던 하얀 지우개가, 백도현의 옷자락 너머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사각.
마치 도화지 위의 흑연을 지워내듯, 지우개의 부드러운 고무가 백도현의 가슴을 문질렀다.
"도현아."
우진의 입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네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사각의 틀. 네가 세상을 향해 휘두르려 했던 그 날카로운 세모. 그리고 완벽해 보여서 더 잔인했던 동그라미. 그것들은 전부 가짜다."
우진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백도현의 가슴을 지웠다.
지우개가 지나갈 때마다, 백도현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전자기 불꽃이 힘을 잃고 스러졌다.
"사람의 삶은 그런 도형 따위로 그려질 수 없어. 우리는 규격품으로 태어난 적도 없고, 결손품으로 버려져야 할 이유도 없었다. 넘어지면 다시 지우고, 잘못 그었으면 또 지우면 돼. 우리에겐 지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백도현의 전신이 굳어졌다.
그의 시야에 비친 우진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오만함도, 구원자의 동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과 똑같이 피를 흘리고, 똑같이 상처 입은, 불완전하고 초라한 한 인간의 눈물겨운 진심만이 박혀 있었다.
"아..."
백도현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머리 위에서 붉은 피를 뿜으며 회전하던 검은 세모의 꼭짓점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스락.
그것은 시스템의 연산 충돌로 인한 파열이 아니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증오의 명분을 잃어버린 도형이, 스스로 형태를 풀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소멸이었다.
6. 백지(白紙)의 도래
치지직, 펑!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의 메인 회로가 과전압을 견디지 못하고 쇼트를 일으키며 하얀 수증기를 내뿜었다.
15만 볼트의 전류가 접지선을 타고 터널 바닥의 물속으로 안전하게 분산되어 흘러나갔다.
광화문 지하를 뒤흔들던 굉음이 멈추었다.
공기를 찢던 초저주파의 진동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백도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세모의 파편들이, 마치 한겨울의 눈송이처럼 하얗게 탈색되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것은 흑연 가루였다.
도화지 위에서 지우개에 밀려 털어내지던 하얀 고무 부스러기와 검은 찌꺼기들.
백도현의 다리가 풀렸다.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은 백도현은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목덜미의 생체 단자에서 흐르던 통증도 마취가 풀리듯 아련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내가 15년 동안 무엇을 붙들고 있었던 거지...?"
백도현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피눈물이 아니었다.
15년 만에 비로소 상처의 껍질을 깨고 터져 나온, 온전한 인간의 눈물이었다.
뒤쪽에 서 있던 유진아 역시 손을 내리고 멍하니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도 어둡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회색의 잔상들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우진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주머니에서 또 다른 물건 하나를 꺼냈다.
백도현이 상도동 작업실 문앞에 남겨두었던, 15년 전 동면 챔버의 티타늄 밸브 파편이었다.
우진은 쪼그려 앉아 백도현의 차가운 손을 잡고, 그 손바닥 위에 밸브 파편을 쥐여주었다.
"이건 이제 흉기가 아니다."
백도현이 눈물 젖은 눈으로 파편을 바라보았다.
"네가 얼어붙어 있던 15년을 견뎌내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영광스러운 증표다."
백도현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내 그는 밸브 파편을 가슴에 품어 안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터널의 묵직한 어둠 속에서, 15년간 닫혀 있던 한 영혼의 차가운 빙벽이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돌아선 그의 눈앞에, 환기구 통로를 통해 내려온 한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서연은 피투성이가 된 우진을 발견하고 눈물을 쏟으며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우진 씨... 끝난 거예요? 정말로...?"
우진은 서연의 부축을 받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우진은 손을 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모서리가 완전히 닳아 콩알만 해진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
그 지우개는 이제 제 소임을 다하고 부드러운 고무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
터널 위쪽, 비상 환기구를 통해 지상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내려왔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오존 냄새가 씻겨 나가고, 젖은 흙내음과 밤공기의 신선한 숨결이 지하 40미터를 가득 채웠다.
7. 무형(無形)의 아침을 향하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지상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우진과 백도현, 유진아는 지상으로 통하는 리프트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철제 리프트가 지상 레벨에 도달하고 육중한 차폐 셔터가 열리자,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밤하늘이 우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자정이 막 지난 시각.
광화문 광장의 가로등 불빛 아래, 수천 명의 시민과 경찰, 소방관들이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던 사이렌은 멈추어 있었고, 무너질 줄 알았던 세종대로의 아스팔트는 굳건하게 대지를 지탱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깊은 안도와 경이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우진의 눈에, 그 수천 명의 인간들이 보였다.
그 누구의 머리 위에도 네모는 없었다.
그 누구의 가슴 위에도 세모는 없었다.
그 누구의 손끝에도 동그라미는 없었다.
꼭두각시 줄선 하나 없이, 저마다의 자유로운 호흡으로 밤하늘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보통의 사람들.
울고 있는 사람, 옆 사람의 손을 꽉 쥐는 사람, 주저앉아 기도를 올리는 사람.
그 불완전하고 다채로운 표정들이야말로, 그 어떤 수학 공식으로도 계산해 낼 수 없는 인간 삶의 찬란한 진실이었다.
"우진 씨, 병원으로 가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서연이 우진의 팔을 감싸 쥐며 애원하듯 말했다.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맑게 웃었다.
"조금만 걷고 싶어요."
우진은 부축을 사양하고, 자신의 두 발로 세종대로의 아스팔트를 딛고 섰다.
상처의 통증이 욱신거렸지만, 뼈를 관통하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생한 실감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에 닿는 것은 오직 빈 공간뿐이었다.
지우개는 백도현의 눈물 속에 녹아내렸고, 수첩은 이미 난로 속에서 재가 되었으며, 머릿속을 맴돌던 기하학의 잔상은 완전히 소멸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무한하고 광활한 내일이라는 이름의 백지(白紙).
'인생은 그려진 궤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우진은 광화문 광장 너머, 저 멀리 어둠 속에 잠든 인왕산의 완만한 능선을 바라보았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잘못 그은 선들을 부단히 지워가며, 매 순간 스스로 첫 획을 그어 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우진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바람 속에는 제천 산골에서 흙을 일구고 있을 아버지의 온기가, 파주 벙커에서 붓을 쥐고 있을 채린의 미소가, 그리고 내일 아침 상도동 작업실 앞 평상에서 그를 기다릴 할머니의 따뜻한 오이냉국 냄새가 묻어 있었다.
완전한 백지 위에, 마침내 강우진이라는 한 인간의 진짜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동쪽 하늘 저편에서, 어둠을 걷어내며 찬란한 새벽의 여명이 은은하게 번져오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