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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4화

지우개의 손길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멈춰 선 발걸음

 

문고리를 쥔 강우진의 손가락 끝에 서늘한 쇠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딛으면 상도역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골목길이었고, 그 길의 끝에는 15만 볼트의 전력을 머금은 채 광화문 지하 공동구에서 대참사를 준비하는 백도현의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서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자정 전후로 터질지 모르는 인과율 축전 유닛의 폭주, 도심 심장부의 함몰, 그리고 시스템의 잔해 속에서 탄생한 괴물들의 복수극.

 

우진의 외투 주머니 안에는 백도현이 남겨두었던 차가운 티타늄 밸브 파편과 손때 묻은 조각도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서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전철에 몸을 실어 광화문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것이 책임을 짊어진 자의 마땅한 궤적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진은 현관문을 밀어젖히지 못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작업실 안쪽, 활짝 열어둔 들창으로 들어온 초여름의 미풍이 작업대 위에 놓인 커다란 백색 켄트지 모퉁이를 가볍게 펄럭이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방 안에 울렸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원목 작업대 위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정성껏 그려 넣었던 세 개의 도형이 선명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단단하고 정갈하게 각을 세운 사각형.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운 꼭짓점을 벼려낸 삼각형.

 

그리고 그 둘을 넉넉하게 품어 안듯 유려하게 곡선을 닫아건 동그라미.

 

네모, 세모, 동그라미.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피를 흘리게 하고, 마침내 해방으로 이끌었던 삶의 이정표들이었다.

 

네모는 평온한 일상이자 안주의 질서였고, 세모는 껍질을 깨부수는 고통과 치열한 각성이었으며, 동그라미는 시작과 끝을 잇는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었다.

 

인간 삶의 세 가지 본질적 궤적.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가슴속이 후련해졌었다.

 

모든 모순과 투쟁이 그 세 도형 안에서 아름답게 설명되는 듯했다.

 

그런데 왜였을까.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발이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우진은 쥐고 있던 문고리를 가만히 놓았다.

 

찰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래치가 걸렸다.

 

그는 홀린 듯이 작업대를 향해 돌아섰다.

 

작업화 바닥이 낡은 장판을 짓밟는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책상 앞에 다시 선 우진은 두 손으로 작업대 모서리를 짚고, 하얀 도화지 위에 흑연으로 새겨진 세 도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창살을 통과해 백지 위로 비스듬한 사선을 긋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흑연 가루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너무나도 완벽한 구도였다.

 

질서와 변화와 초월.

 

그 어떤 철학자도, 그 어떤 수학자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배치된 삶의 형태였다.

 

하지만 우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푸른 안광이 사라지고 온전한 인간의 빛을 되찾은 그의 망막에,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던 세 도형이 낯설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2. 완벽한 도화지의 균열

 

'이게 정말 자유인가?'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한 물음표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역삼역 지하 7층, 오르비스 슈퍼컴퓨터의 메인 콘솔에 자신의 생체 뇌파를 들이밀었을 때 화면 가득 붉게 깜빡이던 'Error: ?'와 닮아 있었다.

 

우진은 도화지 속 사각형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네 변과 직각으로 꺾인 네 모서리.

 

그것은 시스템이 강요했던 억압의 규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안정'이라는 이름의 정답으로 규정하는 순간, 네모는 다시금 인간을 가두는 또 다른 우리(檻)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세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딪치고 깨어지며 위기를 극복하는 각성의 상징.

 

그러나 세모를 '도약'의 정답으로 받드는 순간, 인간은 끊임없이 상처받고 투쟁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라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동그라미는 어떠한가.

 

윤채린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은빛 원환, 규격을 밀어내고 타인을 끌어안는 숭고한 자유의 가능성.

 

우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동그라미는 과연 완벽한 해답이었을까.

 

만약 어떤 사람이 네모의 일상도 버겁고, 세모의 투쟁도 두려우며, 동그라미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도 막막해 길을 잃는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인생인가?

 

아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삶도 정형화된 기하학의 틀 안으로 온전히 구겨 넣어질 수는 없었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복잡다단한 숨결과 눈물, 기쁨과 절망을 편의적으로 요약하기 위해 그어놓은 '규격'에 불과했다.

 

'나는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부쉈다고 믿었다.'

 

우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지훈이 설계한 넥스트 큐브의 오르비스를 불태우고, 5,100만 명의 꼭두각시 줄을 끊어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이 도화지 위에 그어 넣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사각의 굴레를 부수고 나와, 또 다른 세모와 동그라미라는 그럴듯한 철학적 도형을 만들어내고는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지 않았던가.

 

결국 또 하나의 틀이었다.

 

형태를 바꾸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백지라는 무한한 공간에 스스로 테두리를 쳐놓고 그 안에 안주하려 했던 비겁함이었다.

 

백도현이 왜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지, 우진은 문득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15년 전, 시스템은 백도현과 동료들에게 '규격 부적합 결손체'라는 낙인을 찍었다.

 

사각 격자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지하 차폐벽 챔버에 가두고 얼려버렸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여전히 무언가의 형태를 갈구하고 있었다.

 

통제가 사라지자 불안에 떨며 안전한 규격을 되돌려달라고 울부짖던 군중들처럼, 백도현 역시 자신이 당한 고통을 증명하기 위해 '파멸'이라는 또 다른 극단의 형태를 도심 위에 강제로 찍어 누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형태에 집착하는 한,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네모를 부수기 위해 세모를 들이대고, 세모를 감싸기 위해 동그라미를 그리며, 그 동그라미조차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는 끝없는 굴레.

 

우진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 연필깎이 옆에 얌전히 뒹굴고 있던 작은 물건으로 향했다.

 

문구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였다.

 

그것은 어릴 적 잘못 그은 선을 지우기 위해 무심코 쥐었던 물건이었고, 실패를 지워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소박한 도구였다.

 

우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하얀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3. 첫 번째 지움 : 사각형의 해체

 

손아귀에 쥐인 지우개는 부드럽고 묵직했다.

 

우진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선 채로 허리를 숙여, 도화지의 맨 왼쪽에 자리 잡은 사각형(□) 위에 지우개의 모서리를 가져다 대었다.

 

사각사각.

 

마찰음이 고요한 목공 작업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지우개가 지나간 자리에 검은 흑연 가루와 하얀 고무 찌꺼기가 뭉쳐져 밀려 나왔다.

 

우진은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힘으로 손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지워진 것은 사각형의 단단한 밑변이었다.

 

땅을 딛고 서 있던 주춧돌이자, 절대 흔들리지 않을 질서라 믿었던 밑변이 허옇게 지워지며 백지의 결 속으로 파묻혔다.

 

우진의 뇌리에 태성C&I에서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침 8시 40분, 역삼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30층 유리 빌딩 14층 파티션 책상으로 향하던 무수한 출근길.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통장에 찍히던 월급.

 

분기마다 작성하던 물류 보고서와 엑셀 시트의 반듯한 셀들.

 

그것은 안락했다.

 

남들이 보기에 꽤 번듯한 대기업 대리라는 직함은 우진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 주었고, 내일이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사각의 틀 안에서 우진은 매일 조금씩 질식해 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깎아내고, 회사의 방침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의문을 삼키며, 정해진 시간표대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삶.

 

사각사각, 사각사각.

 

지우개가 사각형의 좌우 수직 기둥을 문질러 지워나갔다.

 

우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모든 타협을 지운다.'

 

지우개가 지나는 자리마다 종이의 질감이 다시 살아났다.

 

흑연의 검은 흔적이 흩어지고,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새하얀 종이의 살결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사각형의 윗변, 머리 위를 가로막고 있던 천장이 지우개의 마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진은 손바닥을 들어 지우개 가루를 가볍게 털어냈다.

 

후-, 하고 가쁜 숨을 내쉬며 입바람을 불자 하얀 고무 부스러기들이 작업대 아래로 눈송이처럼 흩날려 떨어졌다.

 

도화지의 왼쪽은 이제 완벽한 백지였다.

 

거기에는 32년간 강우진이라는 인간을 가두어 두었던 출퇴근 카드도, 규격화된 책상도, 타인의 기대와 세상의 상식이라는 사각의 감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안정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안정이라는 틀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하지 않겠다는, 온전한 홀로서기의 선언이었다.

 

4. 두 번째 지움 : 삼각형의 소멸

 

지우개의 모서리가 흑연 가루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우진은 지우개를 손안에서 살짝 돌려, 아직 닳지 않은 깨끗한 모서리를 도화지 가운데에 놓인 삼각형(△)의 꼭짓점에 대었다.

 

날카롭게 솟구쳐 있던 삼각형의 상단.

 

그것은 그가 목격했던 수많은 죽음과 파멸, 그리고 그 파멸에 맞서기 위해 치러야 했던 잔혹한 대가들의 형상이었다.

 

스스슥.

 

우진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지우개가 삼각형의 꼭짓점을 짓이기며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역삼역 승강장에서 처음으로 붉게 회전하던 최 모 씨의 세모가 떠올랐다.

 

강남역 스크린도어 앞에서 어린 민우를 구했을 때, 그 대가로 튕겨 나가 다른 승객의 아버지를 덮쳤던 인과율 보존 법칙의 비극.

 

서지훈이 뿜어내던 차가운 통제의 논리.

 

'인간을 내버려 두면 카오스가 온다. 그러니 통제해야 한다.'

 

그 오만한 논리에 맞서기 위해 우진은 자신의 뇌신경을 불사르고, 관자놀이의 흉터에서 피를 쏟으며 싸웠다.

 

변화 감지로 0.3초 뒤의 미래를 보았고, 4단계 과거 추적으로 상처를 파헤쳤으며, 5단계 연쇄 제어로 인과율의 사슬을 찢어발겼다.

 

그것은 위대한 투쟁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진은 이제 알 수 있었다.

 

투쟁과 각성 역시, 지나치게 몰입하는 순간 또 다른 형태의 중독이 된다는 것을.

 

상처를 훈장처럼 여기고, 고통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믿음조차 하나의 도그마였다.

 

왜 인간은 상처받아야만 성숙해야 하는가?

 

왜 삶은 끊임없는 극복과 투쟁의 연속이어야만 하는가?

 

사각, 사각, 사각.

 

우진의 손놀림이 한층 거칠어졌다.

 

삼각형의 빗변들이 지우개의 압력에 밀려 지워졌다.

 

종이가 찢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작업실 안을 가득 메웠다.

 

광화문 지하에서 복수를 부르짖고 있는 백도현의 일그러진 얼굴이 지워지는 흑연 선 위로 겹쳐 보였다.

 

백도현은 세모에 갇힌 자였다.

 

15년 전 가해진 폭력과 상처라는 꼭짓점에 매몰되어, 온 세상을 자신과 똑같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자.

 

그는 고통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형태 그 자체가 되어버린 가련한 망령이었다.

 

'너의 고통도, 나의 상처도, 여기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삼각형의 밑변을 문질렀다.

 

흑연이 뭉개지며 하얀 지우개 똥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것은 피와 눈물로 얼룩졌던 지난 46일간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지우는 것은 망각이 아니었다.

 

과거의 비극을 빌미로 오늘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었고,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또 다른 상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정화였다.

 

탁, 탁.

 

우진은 손등으로 지우개 가루를 쓸어냈다.

 

도화지의 중앙에 짙게 남아 있던 삼각형의 윤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이 표면에 남은 것은, 연필심이 눌렀던 자리에 생긴 미세한 자국뿐이었다.

 

상처는 있었으되, 그 상처가 더 이상 형태를 지니고 현재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5. 세 번째 지움 : 동그라미의 해방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하나였다.

 

도화지의 오른편에 커다랗게 그려진 완벽한 원.

 

동그라미(○).

 

우진은 검게 닳아 뭉툭해진 지우개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지우개가 미끄러웠다.

 

그는 옷자락에 손을 닦은 뒤, 지우개의 마지막 남은 하얀 면을 찾아 쥐었다.

 

그리고 동그라미의 둥근 테두리 위에 지우개를 얹었다.

 

순간, 손끝이 멈칫했다.

 

동그라미마저 지워야 하는가?

 

동그라미는 자유가 아니었던가.

 

시스템의 격자망을 밀어내던 윤채린의 순수한 척력, 정해진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던 가능성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동그라미마저 지워버린다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작업실 창밖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가 들려왔다.

 

상도동 골목길 저편에서 바람개비를 돌리며 뛰어가던 꼬마 준우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귓전에 닿았다.

 

'아저씨는 커서 뭐가 됐어요?'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때 우진은 대답했었다.

 

매일매일 스스로 만들고 있다고.

 

우진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그러나 깊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동그라미조차도 결국 닫힌 선(線)이다.'

 

원이 아무리 크고 아름답다 한들, 그것은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원의 안쪽에 있는 것은 자유이고, 바깥에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닌가?

 

동그라미를 '궁극의 구원'이라 부르는 순간, 인간은 다시 '동그라미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강박에 사로잡히고 만다.

 

자유는 원환의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이 없는 상태.

 

규정되지 않은 상태.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좋은 그 막막하고도 찬란한 무한함.

 

그것이 진짜 자유였다.

 

스스스슥.

 

우진은 주저 없이 지우개를 밀었다.

 

동그라미의 유려한 곡선이 지우개의 지나감에 따라 지워져 나갔다.

 

채린이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쥐었던 연필의 사각거림처럼, 지우개는 도화지 위에 그어져 있던 마지막 경계선을 지워나갔다.

 

동그라미가 끊어졌다.

 

닫혀 있던 세계의 문이 열리듯, 둥근 호(弧)가 부서지며 백지의 무한한 여백 속으로 녹아들었다.

 

우진은 천천히,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곡선들을 차례로 지웠다.

 

위쪽의 곡선이 지워지고, 아래쪽의 완만한 선이 지워졌다.

 

마지막 한 뼘의 호가 지우개의 마찰 아래 흩날리는 백색 가루로 변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스윽.

 

마침내 지우개가 멈추었다.

 

작업실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우진은 고개를 들고 작업대 위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켄트지 위에는 수북하게 쌓인 검고 흰 지우개 부스러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우진은 두 손을 넓게 펴, 도화지 위의 가루들을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모았다.

 

손바닥에 닿는 고무 가루의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는 모아진 가루들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쓰레기통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화지 표면에 입김을 길게 불어냈다.

 

후우우-.

 

마지막 남은 미세한 흑연의 먼지들이 날아가고, 햇살 아래 온전한 자태를 드러낸 도화지.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각형도 없었다.

 

삼각형도 없었다.

 

동그라미도 없었다.

 

오직 깨끗하고, 광활하며, 아무런 상처도 선도 그어지지 않은 순백의 도화지만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6. 무형(無形)의 경지

 

우진은 작업대 모서리를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뗐다.

 

그의 몸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었다.

 

완전한 비움이자, 완전한 채움이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15년간 그를 괴롭혔던 관자놀이의 통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뇌리에 희미하게 잔상처럼 남아 있던 기하학적 사고의 틀마저 완전히 증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세상을 네모로 재단할 필요도 없었다.

 

세모의 칼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동그라미의 완벽함을 흉내 낼 까닭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세상.

 

불완전해서 아름답고, 정해지지 않아서 눈부신 현실 그 자체.

 

우진의 눈동자 속에 비친 백지는 이제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5,100만 명의 인간들이 각자의 발걸음으로 디뎌나갈 무한한 대지였고, 그 누구도 미래를 예단할 수 없는 찬란한 내일이었다.

 

'백도현.'

 

우진은 나직하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분노와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깊고 투명한 슬픔,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온기 어린 책임감이었다.

 

백도현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오르비스의 차가운 챔버에서 깨어난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복수의 칼날이 아니라, 15년 전에 멈추어버린 채 버려진 가련한 상처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세모의 감옥에 갇혀, 자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차가운 시스템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려 하고 있었다.

 

인과율 축전 유닛으로 도심을 함몰시키고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면, 자신의 잃어버린 15년이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면서.

 

하지만 틀렸다.

 

파멸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또 다른 파멸을 낳고, 그 파멸은 다시 새로운 원한의 격자를 짤 뿐이다.

 

'내가 가야 한다.'

 

우진은 외투 안주머니를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조각도의 나무 자루가 따뜻했다.

 

그리고 백도현이 남겨두었던 챔버의 티타늄 밸브 파편.

 

그것들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었다.

 

지옥에서 막 빠져나와 길을 잃고 날뛰는 길 잃은 아이를 멈추어 세울, 유일한 증거이자 대화의 열쇠였다.

 

우진은 작업대 위에 얌전히 놓인 닳아빠진 하얀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거칠어진 지우개의 표면을 꾹 눌러보았다.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고무의 탄력.

 

선(線)을 긋는 자는 오만해지기 쉽다.

 

자신이 그은 선이 정답이라 믿고, 그 선을 벗어난 것들을 틀렸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우개를 쥐는 자는 겸허하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어진 경계를 지워냄으로써 다시 백지로 돌아갈 용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진은 지우개를 외투 주머니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티타늄 파편과 조각도, 그리고 닳아버린 지우개.

 

이 세 가지가 그가 지닌 전부였다.

 

초능력도 없었다.

 

미래를 보는 눈도, 총알을 튕겨내는 척력도 없었다.

 

그저 32살의 평범한 목수, 실수투성이의 인간 강우진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고, 단단했다.

 

7. 결전의 대지로

 

우진은 돌아섰다.

 

작업실 문을 열자, 시원하고 눈부신 초여름의 바람이 그의 뺨을 기분 좋게 때렸다.

 

골목길 건너편 슈퍼 평상에는 복덕방 할머니가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총각! 어디 좋은 데 가나? 얼굴이 아주 환하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진은 멈추어 서서 할머니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할머니. 잠깐 손볼 게 있어서요."

 

"그래, 날 더운데 조심해서 댕겨와! 저녁에 오면 시원한 오이냉국 줄 테니까 들르고!"

 

"감사합니다. 꼭 들를게요."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저 평상에 앉아 할머니가 건네는 시원한 오이냉국을 들이켤 것이다.

 

골목 어귀에서는 자전거를 탄 민호와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질주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칠흑빛 꼭두각시 줄도.

 

그저 땀방울이 맺힌 이마와,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검은 머리칼만이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저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야 한다.

 

규격 없는 세상에서, 매일 넘어지고 까지면서도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워가는 저 보통 사람들의 불완전한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

 

우진은 성큼성큼 언덕길을 내려갔다.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한서연이었다.

 

우진은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대었다.

 

"서연 씨."

 

- 우진 씨!

 

지금 어디예요?

 

특수본 타격대가 광화문 세종대로 일대 지하 공동구 환기구를 봉쇄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백도현 일행이 이미 지하 40미터 광화문 공동구 메인 관로에 자리를 잡았대요.

 

인과율 축전 유닛의 기폭 전압이 상승하고 있어요!

 

경찰 장비로는 내부 접근이 불가능해요.

 

그자들이 펼쳐놓은 압축 충격파 때문에 진입로가 전부 막혔다고요!

 

수화기 너머로 사이렌 소리와 무전기 노이즈, 그리고 서연의 다급한 숨소리가 뒤섞여 쏟아져 들어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공권력의 물리적 무기는 인과율의 뒤틀림 앞에서 무용지물이었고, 광화문 지하에 응축된 15만 볼트의 결손 엔트로피는 서울의 심장을 날려버리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목소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지금 상도역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2호선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서 광화문으로 바로 갈 겁니다."

 

- 우진 씨...

 

정말 괜찮겠어요?

 

당신한테는 이제 아무런 능력도 없잖아요.

 

그자들은 괴물이 되어버렸어요.

 

15년 치의 증오를 품고 있는 결손체들이라고요!

 

서연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애절한 걱정과 두려움.

 

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능력이 없어서 가는 겁니다."

 

- 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더 강한 힘이나 또 다른 규격이 아니에요. 그 상처를 지워줄 수 있는 사람이지."

 

우진은 주머니 속 둥글게 닳은 지우개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내가 지우개를 가져가고 있어요. 백도현이 그어놓은 증오의 선을, 내가 지울 겁니다."

 

잠시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서연의 숨소리가 가라앉으며, 깊은 신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장 지휘소 뒤편, 4번 환기구 앞에서 기다릴게요.

 

조심해서 와요, 우진 씨.

 

"네. 곧 갑니다."

 

통화를 마친 우진은 상도역 지하철 입구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타일 벽면에 붙은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초라한 목수 작업복, 헝클어진 머리칼, 하지만 눈동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깊은 심연을 품고 있었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백지 위에 그어졌던 모든 도형을 지워낸 손길이, 이제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마지막 어둠의 획을 지워내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