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의 가능성
1. 진동 너머의 호흡
책상 모퉁이에서 울리던 스마트폰의 진동이 뚝 멎었다.
공기를 가르던 서늘한 기계음이 사라지자, 작업실 안에는 대패질된 참나무 판재에서 번지는 묵직한 나무 냄새와 창틈으로 스며드는 초여름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우진은 통화 버튼을 누른 채 조용히 귀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밭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도심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량들의 엔진 소음과 바람을 가르는 마이크의 파찰음이 섞여 있었다.
서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긴박함은 숨길 수 없었다.
"우진 씨, 제 말 들려요?"
"듣고 있습니다, 서연 씨. 숨부터 고르세요."
우진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책상 위 도화지를 내려다보았다.
정교하게 각이 잡힌 사각형(□)과 날카롭게 솟아오른 빗면의 세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아직 흑연의 자국조차 닿지 않은 순백의 빈 공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연이 잠시 마른 침을 삼키더니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특수본에서 당산철교 변전소에 남아 있던 잔류 전력 역류 파형을 역추적했어요. 15만 볼트가 한 번에 빨려 들어간 경로 끝에 찍힌 잔류 펄스 좌표가 방금 떴어요. 백도현 일행이 이동한 방향은 강북 도심이에요. 정확히는 세종대로 사거리와 광화문 지하 공동구 일대예요."
광화문.
대한민국의 행정과 역사가 교차하고 수십만 명의 발걸음이 얽혀 있는 심장부였다.
"놈들이 노리는 곳이 광화문 지하라는 겁니까?"
"네. 오르비스의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은 단순한 배터리가 아니에요. 과거 넥스트 큐브가 중앙 코어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수도권 지하 관로를 통해 방출하던 결손 엔트로피의 찌꺼기들이 그 축전기에 15년 치나 압축되어 있었어요. 당산철교에서 흡수한 초고압 전력은 그 압축된 찌꺼기들을 일거에 도심 지하망 전체로 역류시키기 위한 기폭 전압이었던 거예요. 그게 광화문 지하의 통신·가스·전력 공동구 한가운데서 터지면, 서울 중심부 전체의 지반 침하와 대규모 폭발은 물론이고…… 과거 시스템이 억눌렀던 파멸적 인과율의 충격파가 지상으로 분출돼요."
서연의 설명은 명확했고 서늘했다.
과거의 악몽이 또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심장은 요동치지 않았다.
기계적인 통제도, 시신경을 찌르던 두통도 사라진 평범한 인간의 가슴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피가 차분하게 돌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기폭 예상 시점은요?"
"축전 유닛의 충전 잔류 에너지 안정화 주기를 고려하면, 오늘 자정 전후예요. 늦어도 세 시간 안에는 최종 설치 지점을 찾아내야 해요. 최 차장검사님이 특수본 수사관들과 경찰 타격대를 광화문 지하 통로로 전면 투입하기로 했어요. 저도 지금 그쪽으로 이동 중이에요."
서연이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깊은 안도와 염려가 섞인 숨결이 전해졌다.
"우진 씨는…… 오지 않아도 돼요. 이건 이제 국가와 사회가 짊어져야 할 몫이에요. 우진 씨가 목숨 걸고 오르비스를 부수고 우리 모두의 꼭두각시 줄을 끊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우진 씨는 그 작업실에서 안전하게……."
우진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말리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초인적인 능력을 모두 잃고 평범한 나무를 깎는 목수로 돌아간 자신을 사지로 다시 부르고 싶지 않은 배려였다.
"서연 씨, 기억합니까?"
우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테헤란로 지하에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나누었던 이야기요."
"……네?"
"우리가 싸웠던 이유는 어떤 위대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였죠."
우진은 왼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4B 연필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백도현과 그 피실험자들은 15년 전 시스템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정당할지 몰라도, 그 분노를 무고한 사람들의 내일을 불사르는 데 쓰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고 또 다른 통제일 뿐이에요. 그들이 세상에 쏟아내려는 검은 불길을 막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되찾은 이 작업실의 맑은 햇살과 이웃들의 평온한 저녁을 지키기 위한 제 선택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서연이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더 이상 우진을 말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쌓아 올린 신뢰는 긴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심해서 오세요. 저도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 현장 지휘소에 도착하는 대로 추가 좌표를 확보해 둘게요."
"곧 가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우진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지며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그의 눈빛은 도화지 위 빈자리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2. 곡선이 품은 생명
떠나기 전, 마쳐야 할 일이 있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도화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각형과 삼각형.
안주의 네모와 투쟁의 세모 옆에 남아 있는 하얀 침묵.
우진은 연필을 쥐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흑연 자루를 단단히 받치고, 종이 위로 연필심을 내렸다.
곡선을 그리는 일은 각을 세우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은 호흡과 유연함을 요구했다.
네모는 자를 대고 그으면 그만이었고, 세모는 꼭짓점을 향해 치닫는 직선의 충돌이었다.
하지만 원은 달랐다.
중심을 느끼며 사방으로 균일하게 뻗어나가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끝내 제자리로 부드럽게 돌아와야 하는 궤적.
사각, 사각.
흑연 심이 종이 표면의 미세한 결을 훑으며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원을 지나 아래로 완만하게 굽어 내려가고, 다시 위를 향해 차오르는 하나의 둥근 선.
마침내 시작점과 끝점이 매끄럽게 맞물리는 순간, 도화지 위에 온전한 동그라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의 시선이 그 둥근 원환 안에 머물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동그라미.
과거 그가 보았던 세상 속에서, 동그라미는 언제나 기이하고도 찬란한 '이레귤러'의 빛이었다.
도시 전체가 사각 격자망의 억압에 짓눌려 흑백의 단조로운 궤도를 맴돌 때, 유일하게 시스템의 방정식을 벗어나 은빛으로 회전하던 궤적.
그것은 배후의 통제자들에게는 반드시 색출해 제거해야 할 '버그'이자 치명적인 결함이었지만, 짓밟힌 인간들에게는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사각지대였다.
우진은 연필 끝으로 원환의 윤곽을 천천히 덧대며, 그 동그라미를 품고 살았던 소녀 윤채린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채린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던 작은 아이였다.
자신의 정수리 위에 뜬 은빛 원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감시관들의 칠흑 같은 육면체에 쫓기며 골목길을 헤매던 아이.
하지만 채린의 동그라미는 파괴의 무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뿜어내던 척력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칼날이 아니라, 억압적인 사각 격자망을 바깥으로 밀어내어 무고한 이들이 숨 쉴 공간을 열어주는 순수한 방패였다.
우진은 채린이 제천으로 떠나기 전, 아산병원 옥상에서 그에게 건넸던 스케치북을 기억했다.
'아저씨, 저 이제 미대 갈 거예요. 내 맘대로 그릴 수 있잖아요.'
시스템의 족쇄가 부서지고 손끝의 이능이 모두 사라졌을 때, 채린은 상실감에 젖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손가락 끝에 쥐어진 연필 한 자루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강제로 정해준 궤도가 아니라, 서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색과 선으로 인생을 채워 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환희.
그것이 바로 동그라미가 가진 진정한 본질이었다.
3. 세 가지 궤적의 완성
우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도화지 위에 나란히 늘어선 세 개의 도형을 한눈에 담았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그 세 도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우진의 가슴을 관통하는 거대한 깨달음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머릿속에서 지난 수개월간의 혼란과 번민, 그리고 15년에 걸친 부자간의 비극이 하나의 선명한 맥락으로 꿰어졌다.
'이 세 도형은…… 결코 시스템의 암호나 초월적인 마법 따위가 아니었어.'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삶을 살아가는 세 가지 필연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첫 번째, 네모(□).
그것은 질서이자 안정이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터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집이라는 사각의 공간에서 잠을 자고, 일터라는 사각의 틀 안에서 땀을 흘리며, 규칙과 약속이라는 사각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를 유지한다.
네모가 없다면 인간의 삶은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안정된 반복과 평범한 하루하루의 축적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었다.
그러나 네모에만 안주할 때,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고 만다.
두 번째, 세모(△).
그것은 균열이자 위기이며, 정체된 삶을 뒤흔드는 고통과 변화였다.
평온하던 일상에 균열이 가고, 예상치 못한 사고와 질병, 이별과 실패가 닥쳐올 때 인간의 궤도는 사정없이 꺾인다.
세모는 아프고 쓰라렸다.
하지만 그 뾰족한 꼭짓점에 찔려 피를 흘릴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안주하던 상자의 벽을 자각하고 껍질을 깨뜨릴 힘을 얻는다.
세모의 빗면을 타고 넘지 못하는 생명은 결코 성숙할 수 없었다.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해 내는 치열한 투쟁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단련시키는 풀무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동그라미(○).
그것은 바로 무한한 가능성이자, 정해진 틀을 벗어던지는 자유와 연대였다.
네모의 안정에 머물지 않고, 세모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인간이 마침내 도달하는 드넓은 지평.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원환처럼, 인간은 저마다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간다.
넘어져도 다시 굴러갈 수 있는 유연함.
모서리가 없기에 타인의 상처를 찌르지 않고 서로의 둥근 어깨를 맞댈 수 있는 포용.
'네모에서 안식을 얻고, 세모를 통해 각성하며, 동그라미를 향해 나아가는 것.'
우진의 입가에 잔잔하고 깊은 탄성이 번졌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넥스트 큐브와 서지훈은 인간을 영원히 첫 번째 단계인 '네모'에만 가두어두려 했다.
실패와 아픔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육장을 만들기 위해 세모의 파동을 잘라내고 동그라미의 자유를 죄악시했다.
반대로 지금의 백도현 일행은 두 번째 단계인 '세모'의 덫에 영원히 갇혀버린 자들이었다.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상처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스스로를 옭아맨 채, 그 칼날을 온 세상을 향해 휘두르며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네모에 갇혀서도 안 되며, 세모의 증오에 함몰되어서도 안 되었다.
상처를 딛고 동그라미의 가능성을 향해 걸어 나가야만 했다.
불완전하기에 아름답고, 정해진 답이 없기에 매 순간이 기적인 인간의 길.
우진은 연필을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도화지 위 세 개의 도형은 그가 지난 삶을 통해 온몸으로 증명해 낸 인간 존엄의 궤적이었다.
4. 아버지의 흑연과 연대의 기억
우진은 시선을 돌려 책상 한구석에 놓인 낡은 하드커버 노트를 바라보았다.
부친 강정호가 15년 전 작성하여 남겼고, 오르비스 붕괴 후 특수본의 압수물 해제를 거쳐 우진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온 친필 연구 노트였다.
빛바랜 표지를 넘기자, 아버지가 손수 써 내려간 빽빽한 수식과 기하학적 다이어그램들이 눈에 들어왔다.
□, △, ○.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젊은 날의 아버지는 이 도형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그것을 수학적인 통제와 예측의 도구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지고 시스템이 괴물로 변해갈수록, 아버지는 깨달았다.
인간은 결코 수식의 종속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노트의 마지막 장, 아버지가 코어에 스스로를 바치기 직전 떨리는 필체로 적어 넣었던 마지막 문장이 흑연의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지는 닫힌 계의 엔트로피를 역전시키는 유일한 특이점이다.]
우진의 손가락이 그 투박한 글씨를 어루만졌다.
제천의 산골 연구실에서 낡은 수동 계산기와 흑연 연필을 쥐고 홀로 앉아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우진아, 통계는 사람을 가두기 위한 규격이 아니었다.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빈틈을 어떻게 채워가며 살아가는지를 겸허하게 이해하기 위한 렌즈였어.'
아버지는 15년 만에 되찾은 자유 속에서 비로소 학문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과거의 칩을 벗어던지고 인간다운 미소를 되찾은 태호가 있었고, 피실험자 동생들이 저마다의 작은 일상을 일구어나가고 있었다.
어디 그들뿐인가.
상도동 골목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길 안내 앱이 멈추었을 때 스스로 지름길을 찾아내며 땀을 훔치던 택배 기사.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에서 낡은 북카페 처마 밑에 모여들어 따뜻한 찐 옥수수를 나누어 먹던 낯선 이웃들.
바람개비를 돌리며 '아저씨는 커서 뭐가 됐어요?'라고 맑은 눈망울로 묻던 꼬마 준우.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은빛 동그라미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이나 알고리즘의 계산 없이도, 곤경에 처한 이에게 손을 내밀고, 빗속에서 온기를 나누며, 서툰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평범한 영혼들.
그들이야말로 시스템이 끝내 계산해 내지 못했던 기적의 증거들이었다.
우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화지 위 완성된 동그라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흔들림 없는 결의가 깃들었다.
백도현이 터뜨리려는 것은 단순한 폭탄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려 되찾은 이 거룩하고 소박한 가능성의 세계를, 다시 한번 과거의 잿더미로 되돌리려는 절망의 몸부림이었다.
'그들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복수도, 응징도 아니었다.
세모의 상처에 갇혀버린 가련한 동포들을 향해, 동그라미의 지평이 여전히 열려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책임이었다.
5. 백도현의 궤적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오른쪽 아래 서랍을 열었다.
묵직한 금속 소리와 함께 서랍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서랍 안쪽에는 백도현이 상도동 작업실 문앞에 남겨두었던 차가운 티타늄 밸브 파편이 놓여 있었다.
우진은 맨손으로 그 파편을 집어 올렸다.
영하 수십 도의 초저온 액체 냉매를 견디도록 설계된 특수 합금의 표면은, 여전히 손끝을 아리게 할 만큼 서늘했다.
그 차가운 금속성 질감을 느끼며 우진은 알루미늄 케이스 속 극비 보고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Subject-01 백도현 / 특이사항: 시스템 사각 격자 규격에 대한 극단적 신경 거부 반응 / 인과율 압축 충격파 발현 / 통제 불능 판정 / 화학적 동면 격리 조치].
15년 전, 백도현은 겨우 열두 살 소년이었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지하 밀실에서 뇌간에 칩이 박히고, 온몸의 신경망이 사각 격자망에 억지로 연결되던 날.
소년의 뇌세포는 시스템의 규격을 거부하며 비명을 질렀다.
체온이 40도를 넘나들고 시신경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시스템은 그를 '고장 난 부품'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오르비스의 중앙 챔버 지하 7층, 두꺼운 차폐벽 너머의 영하 수십 도 액체 냉매 챔버 속에 산 채로 얼려버렸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은 흘러갔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를 오갔고, 태성C&I의 마천루가 솟아올랐으며, 계절은 열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차가운 유리 챔버 속에 갇혀 있던 백도현의 시간은 15년 전 그 끔찍했던 밤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그의 몸은 자라 성인이 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신을 버리고 얼려버린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 속에서 매일같이 얼어붙고 찢겨 나갔을 것이다.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
백도현이 남긴 그 삐뚤빼뚤한 글씨는, 15년간 응축된 한 소년의 피맺힌 절규였다.
그는 오르비스가 파괴되던 날 챔버를 깨고 나왔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세상은 해방의 축복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15년간 얼려두었던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죽거나 사라졌고, 세상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햇살 아래서 웃고 있었다.
그 괴리감.
자신들이 겪었던 지옥 같은 세월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그 처절한 소외감과 배신감.
그것이 백도현을 도심 한복판을 불사르려는 파멸의 괴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우진은 티타늄 파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날카로운 모서리가 파고들며 둔탁한 통증을 일으켰다.
피가 배어 나올 듯한 그 통증을 느끼며, 우진은 백도현의 고통을 온몸으로 이해했다.
만약 15년 전, 아버지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째고 칩을 적출해 내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저 차가운 챔버 속에 갇혀 영혼이 썩어 들어가는 결손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우진과 백도현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한 사람은 흉터를 안은 채 세상 속으로 도망쳐 나와 끝내 자유를 쟁취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다가 증오의 괴물이 되어 기어 나왔다.
그렇기에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이 매듭지어야 할 인과였다.
"도현아……."
우진의 입술에서 15년 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피실험자 동포의 이름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너를 그렇게 만든 건 세상의 잘못이지만, 그 분노로 또 다른 무고한 이들을 불태우게 둘 수는 없다."
그것은 단호한 선언이었다.
우진은 티타늄 파편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6. 광화문을 향하여
우진은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짙은 남색 윈드브레이커를 꺼내 입었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도화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흑연의 은은한 광채를 머금은 세 개의 기하학체가 정갈한 종이 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질서와 변화,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
그것은 그가 지난 삶을 통해 길어 올린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우진은 책상 서랍에서 가죽 칼집에 든 단단한 조각도 하나와 튼튼한 면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초능력도, 인과율을 왜곡하는 기적도 없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철컥, 하는 묵직한 쇠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잠겼다.
오후의 맑은 햇살이 상도동 골목길 위로 길게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슈퍼 앞 평상에서는 복덕방 할머니가 다듬던 콩나물 바구니를 내려놓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는 자전거를 탄 소년 민호와 친구들이 쭈쭈바를 입에 물고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바람개비를 든 꼬마 준우가 엄마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며 우진을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우진은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오후.
누군가 미리 짜놓은 각본도 없고, 머리 위에서 감시하는 도형도 없는, 오직 사람과 사람의 온기로 직조되는 불완전하고 눈부신 시간들.
이 평화로운 거리를 지나, 우진은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상도역 지하철역을 향해 내딛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아스팔트 바닥을 단단하게 울렸다.
가슴속에서 세모의 아픔이 잦아들고, 둥근 동그라미의 온기가 잔잔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광화문 지하 깊은 곳, 15년의 어둠 속에서 증오를 불태우고 있을 백도현을 향해.
그리고 그들이 마주해야 할 마지막 진실을 향해.
우진의 그림자가 초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도심을 향해 길게 뻗어나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