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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2화

세모의 기억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흑연 끝에 맺힌 각도

 

상도동 147번지 목공 작업실의 공기는 맑고 서늘했다.

 

오래된 미닫이창 틈새로 비쳐 든 오후의 햇살이 공중에 부유하는 미세한 톱밥 가루를 금빛 입자로 물들이고 있었다.

 

작업실 내부에는 목재 대패질 뒤에 남은 그윽한 송진 내음과 묵직한 참나무의 단내가 섞여 잔잔한 평온을 빚어냈다.

 

벽면 공구 걸이에 가지런히 꽂힌 끌과 대패, 먹통과 직각자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며 단정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무 책상 위에는 새하얀 도화지 한 장이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도화지의 정중앙에는 직전까지 우진이 정성 들여 흑연으로 그려 넣은 완벽한 균형의 사각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로와 세로의 비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그 정직한 네모는, 지난 32년간 그가 안주하고 체념했던 사각의 벽이자 시스템이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그어둔 감옥의 단면이었다.

 

학교의 바둑판 시간표부터 대기업 태성C&I의 좁은 파티션 책상, 그리고 엑셀 시트의 차가운 격자망에 이르기까지 그를 규격화했던 안정의 상징.

 

우진은 4B 연필을 쥔 손가락 끝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 흑연 심의 거친 질감과 나무 자루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 전체로 전해져 왔다.

 

이제는 머릿속을 찢어발기던 바늘 같은 편두통도, 시신경을 타고 번지던 푸른빛의 인과율 잔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그를 옥죄던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선이나 타인의 정수리 위에서 깜빡이던 도형의 기하학체 역시 영구히 소멸해 있었다.

 

보통의 시야, 보통의 인간이 지닌 순수한 육체.

 

그러나 그 담담하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지난 수개월 동안 목숨을 걸고 마주했던 처절한 궤적들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우진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내쉬며 사각형의 오른쪽 빈 공간으로 연필심을 옮겼다.

 

종이와 흑연이 마찰하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작업실 안을 낮고 묵직하게 울렸다.

 

밑변 하나를 수평으로 길게 그었다.

 

그리고 그 밑변의 양 끝에서 비스듬히 솟구쳐 올라가 공중의 한 점에서 뾰족하게 맞물리는 두 개의 사선을 힘 있게 그어 내렸다.

 

삼각형.

 

세모(△)였다.

 

도화지 위에 날카로운 꼭짓점을 하늘로 치켜든 세모가 새겨지는 순간, 우진의 심장 언저리가 묵직하게 조여들었다.

 

안정과 반복을 의미하던 네모와는 질적으로 다른 형태였다.

 

선과 선이 정면으로 부딪쳐 빚어낸 날카로운 파동이자, 기존의 질서와 평온한 궤도를 사정없이 꺾어버리는 위기와 파멸의 상징.

 

우진의 뇌리 속으로 수많은 이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던 붉고 검은 세모들의 잔상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모든 비극과 각성의 시작점이었던 그날의 역삼역이 눈앞에 선명하게 겹쳐졌다.

 

2. 뒤틀린 궤도의 시작

 

그것은 평범한 출근길의 지하철 2호선 열차 안이었다.

 

수많은 직장인이 일상의 무기력한 백색 네모를 머리 위에 띄운 채 규칙적인 진동에 몸을 맡기던 그 좁고 텁텁한 차내에서, 우진은 난생처음으로 핏빛으로 회전하는 세모를 목격했었다.

 

대기업 임원 최 모 씨.

 

그의 정수리 위에서 날카로운 꼭짓점을 곤두세운 채 비명처럼 떨리던 붉은 세모와, 허공 높은 곳으로 뻗어 나가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

 

열차가 역삼역에 도착하고 그 남자가 플랫폼을 벗어난 지 정확히 3분 뒤, 스마트폰 화면에는 이미 송고 시간을 앞질러 작성된 그의 사망 속보가 떠올랐다.

 

송고 시각 11시 58분, 실제 사망 추정 시각 12시 01분.

 

인과가 뒤집힌 세상이었다.

 

사고가 나서 기사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배후의 통제 시스템이 미리 짜놓은 파멸의 시간표에 따라 인간의 목숨을 집행하고 언론을 조작하던 거대한 거미줄.

 

우진은 연필을 쥔 채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 세모를 목격한 순간부터 그가 믿어왔던 평온한 일상은 산산조각 났다.

 

보안 소스코드 유출 누명을 씌우며 자신을 사회적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태성C&I의 박민재 팀장.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타의적 조작의 검은 세모와, 그 음모가 논리적으로 좌절되던 순간 파열하며 역류하던 궤도 붕괴의 끔찍한 파편들.

 

자신을 파멸시키려던 악의가 분쇄되자마자 도리어 가해자 본인의 뇌간을 짓이기며 사회적 몰락으로 이어지던 그 냉혹한 자멸의 법칙.

 

그리고 강남역 스크린도어 앞에서 선로로 떨어질 뻔했던 어린아이 민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기억도 뼈아프게 떠올랐다.

 

그때 우진은 처음으로 자신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믿었었다.

 

추락 직전 붉게 회전하던 아이의 세모를 물리적으로 낚아채, 안정된 일상을 뜻하는 백색 네모로 강제 재구성했던 순간.

 

그러나 그 안도는 찰나에 불과했다.

 

아이를 살려낸 인과율의 잉여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승객들에게 튀어 나갔다.

 

승객 민수의 멀쩡하던 백색 네모에 순식간에 실금이 가며 검붉은 세모로 뒤틀렸고, 그의 아버지는 같은 시각 지방의 산업 현장에서 크레인 와이어가 끊어지는 날벼락 같은 참사를 당했다.

 

'인과율 보존 법칙.'

 

누군가의 파멸을 억지로 틀어막으면, 그 파멸의 총량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가장 인접한 무고한 이웃에게 전이되어 기어이 피를 부른다는 악마 같은 공식.

 

우진은 연필 끝으로 도화지 속 세모의 꼭짓점을 짓누르듯 덧칠했다.

 

그 잔혹한 법칙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 느꼈던 무력감과 절망은, 관자놀이에 박혀 있던 흉터의 편두통보다 몇 배는 더 쓰라리게 심장을 후벼 팠었다.

 

내가 누군가를 살릴수록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뒤틀린 방정식 속에서, 인간의 선의조차 시스템의 거름으로 소모되던 그 끔찍한 절망의 나날들이 도화지 위 흑연 선 사이로 배어 나왔다.

 

3. 칼날 위의 연대

 

하지만 세모는 결코 파멸과 절망의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았다.

 

우진의 시선이 세모의 가파른 빗면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위기와 균열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한계로 몰아붙였지만, 동시에 그 날카로운 모서리 위에서 진정한 인간의 온기와 연대가 피어났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한서연 기자였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든 채 거대 권력의 흑막을 파헤치던 그녀.

 

진실을 좇는다는 이유만으로 머리 위에 검은 세모가 드리워지고, 언론사의 직무 정지와 계좌 동결, 급기야 군용 테르밋에 의한 사무실 전소까지 겪어야 했던 사람.

 

그녀는 파멸의 위기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진 씨, 우리가 멈추면 이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사각 틀 속에서 도살당해요.'

 

차가운 빗길 속에서, 그리고 테헤란로의 최루탄과 총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서연의 맑고 단단한 눈빛.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이 자신을 아웃라이어로 규정하고 주변 인물들을 사회적으로 말살하려던 그 잔혹한 '연좌제 고립 공작' 속에서도, 서연은 도망치는 대신 우진의 손을 굳게 잡았다.

 

국가 재난 전송망 우회 포트를 열고, 마스터 백업본을 품에 안은 채 계엄군의 총구를 마주했던 그녀의 용기.

 

그녀가 있었기에 우진은 아웃라이어라는 저주와 고립감 속에서도 끝내 인간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은빛 동그라미의 소녀 윤채린.

 

시스템의 격자망을 밀어내는 척력을 지녔으면서도, 그 능력을 타인을 지키는 방패로만 쓰고자 했던 아이.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시스템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채린은 단 한 번도 타인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힘을 파괴적으로 휘두르지 않았다.

 

파주 거점 7번 벙커가 계엄군의 장갑차에 포위당했을 때, 채린은 우진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비상 수동 격벽을 내렸다.

 

머리 위의 은빛 원환에 붉은 균열이 번지고 피를 토하면서도, 그녀는 덧없는 시스템의 해킹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순백의 빛으로 승화했었다.

 

'아저씨, 전 괜찮아요. 뒤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가세요.'

 

피를 흘리면서도 맑게 웃어 보이던 그 가녀린 어깨가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가 가슴을 저릿하게 짓눌렀다.

 

또한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바쳤던 피실험자 동포 민도현.

 

자아를 잃어버린 채 검은 집행관으로 살아가다, 마지막 순간 인간다운 의지를 되찾고 동생들을 부탁한다며 스스로 산화했던 그의 뜨거운 눈물.

 

세모는 꺾임이었다.

 

그러나 그 꺾임은 굴복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그어둔 평평한 지평선을 뚫고 솟구쳐 오른 저항의 봉우리였고, 서로의 상처를 맞대고 버텨낸 사람들의 뼈아픈 연대였다.

 

안전한 네모 안에 머물렀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칼날 위에서 피어난 숭고한 영혼들의 교명이었다.

 

4. 설계자의 거울

 

우진은 연필을 쥔 손을 멈추고 창밖의 푸른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상도동의 지붕들 위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세모의 기억 속에서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최후의 망령.

 

서지훈.

 

넥스트 큐브의 총괄 설계자이자, 오리진 코어의 옥좌에 앉아 전 인류를 사각 격자망의 가축으로 박제하려 했던 남자.

 

그의 머리 위에는 도형조차 형성되지 못한 텅 빈 '암흑의 프레임'이 매달려 있었다.

 

3차원의 면조차 형성되지 않은 메마른 사각 테두리.

 

수백 가닥의 전선이 신경계로 파고들어 시스템의 연산 단말로 전락해 버린 비극적인 꼭두각시.

 

우진은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붕괴해 가던 오리진 코어 챔버 콘솔 앞에서 서지훈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고 초전도 냉각 밸브가 터져 나가던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서지훈은 쓰러진 채 우진을 올려다보았었다.

 

'강우진,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나? 자유의지? 그따위 건 인간에게 허락된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피를 토하며 광기 어린 눈으로 일갈하던 서지훈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인간을 내버려 두면 탐욕과 우발적인 실수로 서로를 난도질할 뿐이야! 내 여동생과 부모가 묻지마 살인범의 칼날에 찢겨 죽었을 때 신은 어디에 있었지? 언제 죽고 언제 실패할지 완벽히 계산된 궤도 안에 가두어야만 문명이 보존된다! 불행이 없는 세계, 그것이 유토피아다!'

 

그것은 서지훈 개인의 단순한 광기가 아니었다.

 

199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무런 이유 없이 일가족을 도륙당했던 열 살 소년의 영혼이 빚어낸 거대하고 뒤틀린 방어기제였다.

 

우발적 사고에 대한 극도의 공포,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끔찍한 비극을 견디지 못해 전 인류를 거대한 사각 관짝에 집어넣으려 했던 가련한 설계자.

 

그는 불행을 없애기 위해 인간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빼앗았고, 실패를 없애기 위해 꿈꿀 자유를 박탈했다.

 

그때 우진은 총구를 내린 채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답했었다.

 

'선택권이 없는 평화는 거대한 가축 사육장일 뿐입니다. 아픔도, 슬픔도, 실패도 스스로 겪고 감당해야 인간인 겁니다.'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가 오리진 코어의 심장부에 꽂히던 순간, 서지훈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암흑 프레임이 허공의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것은, 우진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아무런 각본도 정해져 있지 않은 광활한 허공에 대한 처절한 공포였다.

 

'도형이…… 없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

 

공황에 빠져 허공을 더듬던 그의 떨리는 손가락.

 

서지훈은 세모의 대척점에 서고자 했던 자였다.

 

삶의 굴곡과 파동을 모조리 다림질하여 완벽한 평면으로 만들려 했던 자.

 

그러나 결국 그 역시 시스템이 뱉어낸 가장 참혹한 세모의 희생양이었을 뿐이었다.

 

5. 백지 위에 남은 상처

 

우진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도화지 위, 정갈한 네모 옆에 그려진 세모의 선들이 한층 더 짙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네모가 과거의 그를 안주시켰던 안전한 껍질이었다면, 세모는 그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피 흘려야 했던 투쟁의 과정이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15년 전, 아버지 강정호가 자신의 아들을 시스템의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살점을 째고 칩을 적출해 냈던 4cm의 수술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 흉터를 남기며 자신의 뇌간을 코어에 바쳤다.

 

15년 동안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도시의 모든 오염과 결손 엔트로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언젠가 아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찾아와 족쇄를 끊어줄 날만을 기다렸던 아버지.

 

'우진아, 미안하다. 너에게 온전한 세상을 주지 못해서…….'

 

제천의 소나무 숲 연구실에서, 흑연 연필을 쥐고 노란 노트를 메우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주름진 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겪었던 그 지옥 같은 15년의 세월 역시 거대한 세모였다.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여 인과율의 칼날을 대신 받아냈던 거룩한 붕괴.

 

우진의 입꼬리에 엷고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그 고통스러운 세모의 빗면들을 기어오르고,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이며 온몸이 찢겨 나갔기에 비로소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

 

만약 세모가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태성C&I의 좁은 파티션 책상에 앉아 엑셀 숫자를 맞추며 타인이 던져주는 백색 네모의 일상에 만족하는 노예로 살았을 것이다.

 

고통은 잔혹했지만,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명이었고 각성의 대가였다.

 

삶이란 평온한 직선이 아니라, 언제든 꺾이고 요동치는 파동이라는 사실을 그는 세모를 통해 배웠다.

 

실패할 수 있기에 선택이 소중하고, 상처 입을 수 있기에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진실.

 

도화지 속 세모는 더 이상 그에게 공포의 기하학체가 아니었다.

 

인간이 온전한 자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장의 증표였다.

 

6. 서랍 속의 쇳소리

 

그때였다.

 

열어둔 작업실 창문 틈으로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날카롭게 스며들었다.

 

바람결을 타고 들어온 것은 초여름의 풋풋한 풀내음이나 익숙한 골목길의 냄새가 아니었다.

 

미세하게 살을 에는 듯한 금속성의 비린내.

 

그리고 아주 희미하지만 공간의 압력을 비틀며 대기를 짓누르는 이질적인 파동이었다.

 

우진의 손이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초능력은 사라졌다.

 

도형을 보는 눈도,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내던 척력도, 미래를 0.3초 앞서 내다보던 감각도 이제는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온몸의 신경과 근육에 새겨진 생존의 본능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진은 연필을 내려놓고 책상 아래 오른쪽 서랍을 응시했다.

 

그 서랍 깊은 곳에는 백도현이 작업실 계단 문앞에 남겨두고 갔던 '티타늄 합금 밸브 파편'이 들어 있었다.

 

영하 수십 도의 초저온 액체 냉매를 견디도록 특수 주조되었던 15년 전 화학적 동면 챔버의 배관 조각.

 

그 파편 표면에 서려 있던 차가운 냉기와 인과율 압축 충격파의 흔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 곁에는 서연이 건네주었던 극비 보고서 한 부가 잠들어 있었다.

 

[15년 전 특수 시설 1세대 피실험체 폐기 및 격리 보고서].

 

오르비스 코어의 규격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뇌세포 거부 반응을 일으켜 '결손체'라는 낙인이 찍힌 채 15년간 얼어붙어 있어야 했던 일곱 명의 아이들.

 

그들은 시스템이 붕괴하던 날, 15년 치의 억압된 분노와 축적된 결손 엔트로피를 품은 채 깨어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Subject-01, 백도현.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

 

백도현이 남긴 협박 쪽지의 활자가 뇌리에서 붉게 점멸했다.

 

놈들은 넥스트 큐브 지하 매몰지에서 기어이 오르비스의 심장부였던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을 뜯어냈다.

 

그리고 지난밤,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하부 변전 시설의 15만 볼트 순환선 초고압 전력을 통째로 흡수해 그 유닛을 100% 충전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5만 볼트의 초고압 전력과 15년 동안 응축된 결손 엔트로피의 결합.

 

그것이 도심 한복판에서 폭발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서지훈의 통제와는 또 다른 형태의 재앙이었다.

 

통제에 짓밟힌 자들이 품어낸 맹목적인 증오와 파괴.

 

우진은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세모의 희생양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걷고자 하는 길은 타인을 위한 숭고한 저항의 세모가 아니었다.

 

세상 전체를 자신들이 겪었던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 함께 자멸하려는 칠흑 같은 검은 세모의 폭주였다.

 

그 파괴를 방치한다면,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되찾은 이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자유의 아침은 다시 한번 잿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7. 세모를 완성하다

 

우진은 서랍에서 시선을 거두어 다시 책상 위의 도화지를 내려다보았다.

 

네모 옆에 우뚝 솟아 있는 세모.

 

밑변에서 출발해 가파른 정점을 찍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그 궤적은, 그가 살아온 삶의 가장 뜨겁고 처절했던 분기점들을 고스란히 웅변하고 있었다.

 

서지훈과의 대립.

 

시스템의 잔혹한 진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손을 잡아주었던 서연, 채린, 태호, 그리고 아버지.

 

우진은 연필을 다시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세모의 빗면 안쪽에 엷은 음영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흑연 가루가 종이의 미세한 결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며 삼각형의 내부에 묵직한 깊이감을 더해주었다.

 

세모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평온한 네모에 안주하던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대가.

 

피와 눈물, 상실과 각성이 한데 엉겨 붙어 만들어낸 가장 인간다운 투쟁의 흔적.

 

음영 작업을 마친 우진이 연필을 종이에서 살며시 뗐다.

 

완성된 세모는 날카로웠지만, 더 이상 위협적이거나 불길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온몸으로 운명과 부딪쳐 승리한 자만이 가슴속에 품을 수 있는 단단하고 고결한 흉터와도 같았다.

 

"그래……."

 

우진의 입술 사이로 나직하고 단단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 세모가 없었다면, 난 결코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겠지."

 

이제 종이 위에는 두 개의 도형이 온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질서와 안주의 네모(□).

 

변화와 투쟁의 세모(△).

 

그리고 그 세모의 오른쪽에는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드넓은 백지가 남아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그 텅 빈 공간에 머물렀다.

 

그곳에 채워 넣어야 할 마지막 기하학체.

 

기존의 모든 틀을 깨부수고, 한계 없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

 

'동그라미(○).'

 

연필을 쥔 우진의 손끝이 마지막 도형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잉- 지잉-.

 

작업실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 날카로운 진동음을 울리며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화면이 번쩍이며 푸른빛을 뿜어냈다.

 

발신자 표시에 뜬 이름은 세 글자였다.

 

'한서연.'

 

우진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