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무너지는 제국
1. 찢겨 나간 국경
만주국(滿洲國) 신징(新京)의 관동군(關東軍) 총사령부 지하 지휘 벙커는 이미 산 자들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두께가 삼 미터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벽을 타고 묵직하고 음산한 진동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수백 킬로미터 밖 동부 국경에서 날아오는 대구경 중포의 여진은 지하 깊숙한 바닥판을 뒤흔들며 사람의 내장까지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린 백열전구가 미친 듯이 흔들릴 때마다 바닥판 위에 넓게 펼쳐진 10만 분의 1 전술 지도 위로 검고 긴 그림자가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의 손끝이 파랗게 질린 채 종이 지도 모서리를 부서뜨릴 듯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흉측하게 돋아나 있었다.
"야전 전화선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제1선 방어 사단들과의 연락망은 왜 아직도 복구되지 않는 거냐!"
야마다의 쉰 목소리가 벙커 안을 찌르고 들어갔으나, 달려온 통신참모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전부 끊어졌습니다! 무단장(牡丹江) 방면의 제5군 사령부는 이미 통신 두절이며, 둥닝(東寧)과 후터우(虎頭)의 영구 요새선마저 적 기갑 군단의 전격적인 우회 돌파로 유선망이 모조리 절단되었습니다!"
"거긴 천연의 요새다! 제국 육군이 십 년 동안 피땀을 쏟아 콘크리트를 들이부은 불락의 방어선이란 말이다! 어찌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뚫린단 말이냐!"
"적의 화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소련군의 카튜샤 다연장 로켓포와 중포병 사단들이 분당 수만 발의 포탄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지표면 전체가 융단폭격으로 뒤집혀 영구 요새의 콘크리트 엄패호조차 통째로 생매장 당하고 있다는 마지막 단편 보고 이후로는 오직 파찰음뿐입니다!"
통신참모의 목소리는 흐느낌을 넘어 절규에 가까웠다.
과장이 아니었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150만 대군은 국경 방어선을 순차적으로 두드리는 고전적 전술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방어선을 짓이겨 지형 자체를 지워버리는 거대한 폭풍이었다.
동부와 서부, 북부의 삼면 국경에서 일제히 쇄도한 다섯 겹 장갑의 T-34-85 전차 군단은 요새를 에워싸고 시간을 끄는 대신, 측면의 완충지대를 단숨에 찢어발기며 종심 깊숙한 배후 도로망을 장악해 들어갔다.
만주 주둔 관동군은 이미 태평양 전선으로 정예 사단과 중장비를 모조리 차출당해 속이 텅 빈 허수아비였다.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둔전병처럼 남겨졌던 신설 부대들이 붉은 군대의 맹렬한 철갑 파도 앞에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제국 육군의 자존심이라 자부하던 97식 중전차 치하 따위는 소련 전차포의 철갑유탄 한 발에 장갑판째 찢기며 포탑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총사령관 각하! 조선군(朝鮮軍) 사령부로부터 긴급 암호 전문입니다!"
작전참모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참모의 떨리는 손에는 막 인쇄된 전문 용지가 들려 있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선봉 기동부대가 만주 동부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 나진(羅津)과 웅기(雄基) 방면으로 쇄도하고 있습니다! 소련 태평양함대의 어뢰정과 해군 육전대가 이미 웅기 항만에 포격을 개시하며 상륙을 시도 중이라고 합니다!"
벙커 안의 모든 소음이 단숨에 삼켜졌다.
참모들의 숨소리조차 멎었다.
만주 전선이 무너진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파멸이었으나, 붉은 군대의 칼날은 이미 만주를 넘어 식민지 조선 반도의 북방 문턱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야마다 대장의 턱이 덜덜 떨렸다.
벽면 한가운데 걸려 있던 일장기가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피비린내 나는 붉은 멍 자국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불과 사흘 전 히로시마(廣島)가 정체불명의 신형 폭탄 한 발에 십만 명의 목숨과 함께 잿더미로 증발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이토록 순식간에 북방의 제국마저 통째로 침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백만 관동군의 신화는, 실상 단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모래더미에 불과했다.
2. 도쿄의 비명과 침묵
도쿄(東京) 육군성 지하 대본영 방공호의 공기는 퀴퀴한 곰팡이와 타들어 가는 극비 문서의 재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지 않은 황도는 암흑 속에 잠겨 있었고, 방공호 내부의 텁텁한 어둠 속에서 장성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을 타고 흘렀다.
철제 탁자 위에는 방금 전 규슈(九州) 서남부에서 날아온 전보 용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長崎) 상공에 또다시 태양보다 밝은 섬광이 번뜩이며 버섯구름이 솟구쳤다는 참극의 보고였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핏발이 허옇게 선 눈으로 가죽 지휘봉을 내던지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소련 놈들이 소·일 중립조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배신을 때렸다고 해서 황군이 꼬리를 내릴 수는 없다! 이것은 배신이다! 야만적인 슬라브 놈들에게 굴복할 바에는 1억 신민이 옥쇄(玉碎)를 선택해야 한다! 결호 작전(決號作戰)을 즉각 전면 발동해야 한다!"
아나미의 목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마주 앉은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의 얼굴은 피 한 방울 통하지 않는 석고상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고는 김이 서린 안경을 천천히 벗어 닦으며, 짓씹어 뱉듯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직도 그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요, 아나미 육상! 만주의 관동군은 이미 지도 위에서 지워졌소! 지금 이 순간에도 소련의 기갑 군단이 파죽지세로 조선의 국경을 유린하며 남하하고 있단 말이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까지 신형 폭탄에 증발했소! 다음 폭탄이 미군의 손에 들려 도쿄의 황궁 바로 위에 떨어져야 제국의 파멸을 인정하겠소!"
"입을 닥치시오, 외상! 1억 신민이 결사항전의 각오로 본토에 상륙하는 미군을 물고 뜯는다면 결코 제국은 패망하지 않소! 적에게 중재를 구걸하겠다며 모스크바의 발밑에 엎드려 시간을 낭비한 외무성의 무능함이 이 참극을 자초한 것 아니오!"
"그 소련이 바로 어젯밤 우리 사토 대사를 크렘린으로 불러 선전포고문을 면전에 집어던졌소! 조약국에 매달리던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우스운 꼴이었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오! 이제 중재 따위는 없소! 남은 것은 무조건 항복이냐, 아니면 민족 전체의 멸절이냐 둘 중 하나뿐이오!"
두 사람의 격렬한 고함이 지하 방공호의 낮은 천장을 때렸다.
살기 어린 긴장감 속에서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무겁게 입을 뗐다.
"조선에 주둔 중인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관동군의 주력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소련 해군 육전대가 웅기 항구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함경북도의 철도망이 마비되었습니다. 현재의 방면군 전력으로는 한반도 북부에서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방공호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해졌다.
대본영의 육해군 수뇌부 장성들은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들은 군사적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 기갑사단과 해군 육전대가 조선 반도를 타고 내달리는 속도라면,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붉은 군대의 깃발이 부산항 부두에 꽂힐 것이 뻔했다.
그것은 36년간 억압하며 수탈해 온 식민지 조선의 상실을 넘어, 전후 소비에트 연방이 극동의 모든 패권을 독식함을 의미했다.
아나미 육상은 차가운 군도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쥐었으나,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가락 끝은 엄습해 오는 파멸의 공포를 끝내 감추지 못했다.
제국은 이미 죽어 숨이 멎어 있었고, 군부의 망령들만이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며 헛된 발악을 이어가고 있었다.
3. 펜타곤의 밤, 지도 위의 시선
지구 반대편, 미국 워싱턴 D.C.
펜타곤 지하 4층의 합동작전기획실의 시계 바늘은 8월 9일 자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실내의 공기는 줄담배로 인한 매캐한 청회색 연기와 식어버린 블랙커피의 씁쓸한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탁자 곳곳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 사이로 텔레타이프 기계가 쉴 새 없이 덜컹거리며 마닐라와 모스크바에서 타전되는 극비 전문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전쟁부 차관 존 맥클로이(John McCloy)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전문 용지에 찍혀 나오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믿기 힘들 만큼 긴박했다.
소련 극동군이 만주 국경을 돌파한 지 불과 수십 시간 만에 관동군 주력의 퇴로를 끊고 조선 북방 국경 지대로 쇄도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맥클로이의 뒤편으로 작전국 전략기획과 소속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과 국무부 실무 장교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섰다.
"차관님, 모스크바의 애버럴 해리먼 대사가 보낸 긴급 타전 전문입니다. 소련군 총참모부의 진격 계획은 단순한 대일 참전 수준이 아닙니다.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만주 전역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대한 신속한 진주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첩보입니다."
딘 러스크의 목소리는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맥클로이는 벽에 기대어 서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번즈 국무장관도 동의했어. 한반도 전역이 스탈린의 발아래 통째로 떨어지는 사태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 소련군이 한반도를 독점하는 순간, 전후 일본 열도의 안전은커녕 서태평양 전체가 공산 진영의 손아귀에 넘어간다."
찰스 본스틸 대령이 탁자 중앙으로 성큼 다가와 대형 지도를 거칠게 펼쳐놓았다.
합참의 군용 정밀 작전 지도도 아니었다.
워싱턴 시내 국가지리학회 사무실에서 급히 공수해 온, 내셔널지오그래픽사에서 인쇄한 아시아 전도였다.
열강의 전략가들에게 극동의 작은 반도는 그동안 독자적인 군사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변방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 두 장교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좁고 길쭉한 반도 지형 위로 사납게 곤두박질쳤다.
"현재 우리 군의 배치 상황이 최악입니다."
본스틸 대령이 황동제 컴퍼스를 지도 위에 내리찍으며 낮게 읊조렸다.
"맥아더 장군의 극동육군 주력은 여전히 오키나와와 필리핀 루손섬 일대에 분산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제24군단 병력을 차출해 한반도로 수송한다 해도, 선발대가 인천이나 부산에 발을 들이는 데 최소 3주에서 한 달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장에 도달하기 전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부산 앞바다까지 질주한다는 뜻이군."
맥클로이가 턱을 괴며 씁쓸하게 짓씹었다.
딘 러스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지도 위로 몸을 바싹 숙였다.
"스탈린은 이미 150만 병력과 5천 대가 넘는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그들의 물리적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우리 군사력은 현장에 전무합니다. 지금 우리가 소련군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것은 군사적 실력이 아니라 오직 외교적 경계선뿐입니다. 소련군에게 '이 선 이남으로는 내려오지 말라'고 요구할 명확하고 단호한 항복 접수 경계선이 필요합니다."
"붉은 군대가 피를 흘리며 관동군을 도륙하고 있는데, 총 한 발 쏘지 않은 우리가 그어 보낸 선을 스탈린이 순순히 수용하겠는가?"
맥클로이의 회의적인 반문에 본스틸 대령은 말없이 연필을 쥐었다.
그의 연필 끝이 함경도와 평안도를 지나 남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수도 서울.
그리고 그 서울을 품고 있는 한반도의 정중앙 허리춤.
본스틸의 손가락이 북위 38도선이라는 굵은 가상의 궤적 위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워싱턴의 차가운 지하 밀실에서, 그 땅에 살아 숨 쉬는 3천만 민중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국토의 혈맥을 동강 낼 보이지 않는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4. 명동 지하, 새어 나오는 불안
같은 시각, 경성(京城) 명동 뒷골목의 밤은 죽은 짐승의 내장처럼 서늘하고 적막했다.
전시 등화관제가 엄격하게 내려진 도심은 단 하나의 불빛도 허용되지 않은 채 칠흑 같은 암흑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간간이 골목 어귀를 스쳐 지나가는 일제 헌병 순찰대의 쇠못 박힌 군화 소리만이 적막한 돌바닥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그러나 버려진 폐 한약방 건물 뒤편, 썩은 가마니와 깨진 독더미 아래 은폐된 지하 창고 안은 화덕 같은 열기와 긴장감으로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수동식 활판 인쇄기의 묵직한 쇠마찰음이 어둠 속에서 삐걱거리며 규칙적으로 울렸다.
가마솥 바닥 같은 지하실 한구석에서 한도윤은 기름과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팔소매로 훔쳐내며, 납활자를 분주히 골라 조판틀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나무 궤짝 위에 놓인 단파 라디오 수신기의 헤드폰을 귀에 짓누르고 있던 이정희가 갑자기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흑연 연필이 갱지 위에서 맥없이 뚝 부러졌다.
"정희야, 왜 그래? 어디서 무슨 소리라도 잡혔어?"
시커먼 잉크가 묻은 고무 롤러를 연신 밀고 있던 김성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이정희는 핏기 없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도윤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전율이 서려 있었다.
"도윤 오빠…… 소련이에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만주 전선을 완전히 돌파했어요."
도윤의 손이 허공에서 딱 굳었다.
그가 쥐고 있던 조그만 납활자 하나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도윤은 숨을 죽인 채 정희에게 성큼 다가섰다.
"어젯밤 자정을 기해 대일 선전포고를 했대요.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극동군 150만이 만주 전 국경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답니다. 관동군 주력 방어선이 몇 시간 만에 붕괴하고, 소련군 전차 군단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어요. 게다가…… 소련 태평양함대의 해군 육전대가 이미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웅기와 나진에 상륙 작전을 개시했답니다."
정희의 보고는 떨리고 있었으나 정확했다.
성호는 손에 쥐고 있던 잉크 주걱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주체할 수 없는 환희와 격정이 번져 올랐다.
"나진? 웅기? 도윤아, 들었어? 붉은 군대가 우리 땅 국경을 넘어왔대! 왜놈 헌병 놈들이 박살이 나고 있는 거야! 도쿄 놈들도 손을 못 쓴대잖아! 드디어 왜놈들이 망하는 거야! 해방이야, 도윤아! 우리가 이긴 거라고!"
성호는 당장이라도 지상으로 뛰쳐나가 소리라도 지를 듯 주먹을 불끈 쥐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광기 어린 환희에 휩싸인 성호와 달리, 도윤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호야. 주둥이 닥치고 소리 낮춰."
도윤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찬물을 끼얹듯 지하실 안을 내리눌렀다.
성호의 환호가 목구멍 안으로 컥 하고 걸려 들어갔다.
"도윤아…… 왜 그래? 왜놈들이 하루아침에 뼈도 못 추리고 박살이 난다는데, 기쁘지도 않아? 십수 년을 바라던 광복이 코앞인데!"
"기뻐할 일이 아니다, 성호야."
도윤은 벽면 흙벽에 못 박아 둔 낡은 조선 전도 앞으로 걸어갔다.
누렇게 바랜 종이 지도 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시베리아와 만주의 거대한 대륙이 위압적으로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었다.
"왜놈들이 물러간 자리에 누가 발을 디디는지를 똑바로 봐야 해. 소련의 붉은 군대다. 그들이 조선 민족을 해방해주겠다는 자비심으로 피를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오는 줄 아느냐? 만주는 물론이고 이 기름진 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거다."
"그렇지만…… 연합국이잖아! 미국이랑 소련이 손을 잡고 파시스트 놈들을 때려잡는 거 아니었어?"
"손을 잡은 건 눈앞의 적인 일본 놈들이 같았기 때문일 뿐이다."
도윤의 음성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북쪽의 거대한 곰이 남쪽으로 발톱을 들이밀고 내려오면, 태평양 건너편의 독수리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느냐? 미군 역시 남쪽 바다를 가르고 필사적으로 올라올 거다. 결국 이 땅은…… 왜놈들의 전시 수탈지에서 미·소 양대 열강의 피비린내 나는 각축장으로 간판만 바뀌는 것뿐이야."
5. 배반의 냄새와 거리의 동요
이정희는 나무 궤짝 위에 놓인 전파 도청 기록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도윤 오빠의 직감이 맞아요. 낮에 종로통과 본정통(本町通)의 사정을 은밀히 살피고 왔는데, 거리의 공기가 이미 뒤집혀 있었어요. 조선총독부 고관들의 관사 앞에는 아침부터 시커먼 관용 트럭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어요. 가재도구와 기밀 서류 상자들을 미친 듯이 실어 나르며 부산 방면으로 탈출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더군요."
"관료 놈들이 먼저 제국의 끝을 직감한 거지."
도윤이 씁쓸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국민총력연맹이니 대화동맹(大和同盟)이니 하며 학도병 지원을 선동하던 거물 친일파들의 저택 문이 굳게 닫혔어요. 식솔들을 시골로 피난시키느라 난리가 났고, 종로경찰서의 고등계 순사 놈들은 뒤뜰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사상범 명부와 신원 조사철을 정신없이 불태우고 있었어요. 어떤 발 빠른 자들은 벌써부터 경성 바닥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학파 청년들을 거액을 주고 수소문하며, 미군이 들어올 때 내밀 연줄을 찾고 있답니다."
정희의 차분한 목소리에 담긴 참담한 현실에 성호의 두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이 개만도 못한 역적 놈들! 제 민족의 피와 고혈을 짜내 천황폐하에게 바치던 더러운 주둥이로, 이제는 새 주인의 군화를 핥겠다고 발버둥을 쳐? 내 당장 도끼라도 들고 가 그놈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말겠어!"
"흥분하지 마라, 성호야.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도윤이 잉크 찌꺼기가 묻은 손으로 성호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어 내렸다.
"총독부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찰나, 경성 바닥은 거대한 무법천지의 진공 상태에 빠져들 거다. 굶주리고 억눌렸던 민중은 눈앞의 해방감에 취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겠지만, 진정한 폭풍은 바로 그 환호 뒤편에서 닥쳐오는 법이다. 준비된 자들만이 그 혼란 속에서 권력의 칼자루를 쥐게 돼."
도윤은 등잔대 옆에 놓인 인쇄용 전단 초안을 집어 들었다.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는 종이 위에는, 그들이 밤을 새워 납활자를 파서 박아 넣은 굵직한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조선 민족의 자주적 결의를 촉구함 — 외세의 분할 점령을 경계하고 자주적 자치 질서를 확립하라]
"우리가 이 어두운 토굴 속에서 찍어내는 이 얇은 종이 한 장이, 열강의 전차와 전함에 비하면 한낱 먼지처럼 무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중이 깨어나 스스로 질서를 세우지 못하면, 우리는 왜놈의 식민지 사슬을 끊어내자마자 외세의 발아래 또다시 찢겨 나가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될 뿐이야."
도윤의 시선은 낡은 전도 위의 척추처럼 뻗어 내린 백두대간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북방에서 노도와 같이 밀려 내려오는 소련군의 붉은 해일.
그리고 남쪽 태평양의 물결을 가르며 올라올 미국의 거대한 철갑 함대.
그 두 개의 거대한 외세의 파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과연 어디가 될 것인가.
그 거대한 충돌 속에서 이 가녀린 강토가 두 토막으로 잘려 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한 한기는 결코 과장된 상상이 아니었다.
반세기 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해 나라의 운명을 외세의 칼날 위에 내맡겨야 했던 구한말의 참혹한 비극이, 다시금 피비린내 나는 망령이 되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6. 어둠 속에서 마주친 그림자
인쇄소의 무거운 철제 덧문 너머, 지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르고 좁은 계단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탁, 탁탁, 탁.
규칙적이면서도 다급한 타격음.
지하 인쇄소 결사대원들만이 공유하는 목숨과도 같은 비상 암호였다.
순간 성호가 허리춤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쇠갈퀴를 뽑아 들며 문 옆으로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이정희는 반사적인 손놀림으로 등잔의 심지를 최대로 낮추었다.
지하실 내부는 순식간에 사람의 숨소리조차 삼켜버린 차가운 암흑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도윤은 주머니 속 권총의 안전장치를 조용히 밀어 올린 채, 숨을 죽이고 철문 틈새로 다가섰다.
"누구냐."
도윤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갔다.
"……개벽(開闢)의 아침을 기다리는 자요."
어둠 너머에서 헐떡이는 목소리로 암구호가 흘러나왔다.
도윤은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었던 어깨를 미세하게 풀며 무거운 빗장을 벗겨냈다.
끼이익 하는 녹슨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계단 위에서 흙먼지와 비린내를 뒤집어쓴 중년 사내 하나가 허물어지듯 지하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조수이자 결사대의 핵심 외곽 연락망을 담당하던 박진태였다.
사내의 셔츠 깃은 땀과 검붉은 피로 지저분하게 엉겨 붙어 있었고, 뺨에는 깊게 긁힌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진태 형님! 어쩌다 이 지경이 되셨습니까! 헌병대에게 쫓기신 겁니까!"
성호가 기겁하며 달려들어 그를 부축해 나무 의자에 앉혔다.
이정희가 다급히 사기그릇에 냉수를 가득 떠 오자, 박진태는 사레가 들릴 정도로 물을 들이켜고는 떨리는 손으로 도윤의 멱살을 쥐어뜯듯 움켜잡았다.
그의 동공은 극심한 공포와 경악으로 심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도윤아…… 큰일 났다. 경성역(京城驛) 일대에 이미 위수령 준하는 비상경계망이 깔렸다. 헌병대 놈들이 철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북행 군용 열차를 모조리 강제 징발하고 있어."
"북행 열차를 말입니까?"
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북쪽으로 증원군을 보내려는 게 아니다. 관동군에서 도망쳐 내려오는 고급 장교의 일가족들과 군사 기밀 서류들을 한반도 남단 부산으로 빼돌리기 위해 역방향 회송 열차를 확보하려는 게야. 하지만…… 진짜 충격적인 건 그게 아니다."
박진태는 주변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더니 도윤의 귀에 입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로 파들파르 떨리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놈이…… 오늘 오후 비밀리에 조선인 지도자들을 은밀히 접촉했다. 여운형(呂運亨) 선생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에게 사람을 보내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겨받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고 있단 말이다!"
지하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성호의 손에서 쇠갈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제 식민 통치의 최고 권력 기관인 총독부가, 자신들이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부르며 감옥에 가두고 감시하던 조선인 민족 지도자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것은 풍문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의 절대적인 패망과 항복이 이제 시간 단위의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뜻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7.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
"총독부 놈들이…… 제 발로 기어 나와 정권을 넘기겠다고 사정을 했단 말입니까?"
김성호의 떨리는 음성에는 경악과 허탈함이 뒤섞여 있었다.
박진태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은 이미 대본영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천황의 항복 방송이 나오는 순간, 지난 삼십육 년간 핍박받던 수천만 조선 민중의 피 끓는 보복이 제놈들의 목을 벨 것이라는 공포에 질려 있는 게지. 그래서 여운형 선생 같은 명망 있는 민족 지도자를 앞세워 방패막이로 삼고, 조선에 거주하는 왜놈 거류민들과 군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받으려는 흉계다."
"치졸하고 비열한 쥐새끼 같은 놈들……."
도윤이 어금니를 사납게 갈아붙였다.
그러나 한도윤의 서늘한 눈빛은 총독부의 야비한 거래 그 너머에 도사린 거대한 비극의 심연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총독부가 치안권을 넘기겠다는 것은, 곧 이 땅의 모든 통치 체제가 허공으로 증발하며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함을 의미했다.
북쪽 국경에서는 소련군의 붉은 군대가 파죽지세로 물밀듯 내려오고 있다.
남쪽 바다에서는 승리에 도취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가 군침을 삼키며 북쪽을 주시하고 있다.
주인 없는 폐허로 변해버린 반도.
그 텅 빈 먹잇감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대륙의 곰과 해양의 독수리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맹렬하게 질주해 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도윤 오빠,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전단을 더 찍어야 해요."
이정희가 단호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그녀의 두 눈은 등잔 불빛을 받아 푸른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총독부가 누구에게 치안권을 넘기든 상관없어요. 외세의 군대가 이 땅에 발을 들이기 전에, 우리 민중 스스로 건국 준비 기구를 조직하고 자주적인 정부의 기틀을 완성해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북쪽은 소련군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고, 남쪽은 미군의 총칼 아래 놓이는 군정(軍政)의 노예가 되고 말 거예요."
"정희 말이 옳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
도윤은 박진태의 흙먼지 묻은 어깨를 단단히 쥐어 진정시킨 뒤, 다시 무거운 활판 인쇄기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성호도 더는 묻지 않고 잉크 묻은 롤러를 힘차게 그러쥐었다.
정희는 백지를 한 장씩 조판대 위에 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철커덕, 쿵.
철커덕, 쿵.
묵직하고 차가운 무쇠의 파열음이 지하 암실의 적막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새하얀 종이 위로 굵직하게 박혀 나오는 먹물 묻은 글자들은, 어쩌면 며칠 뒤면 닥쳐올 열강의 거대한 군홧발 아래 흔적도 없이 짓밟혀 흩어질 한 줌의 종이비행기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기계를 멈출 수 없었다.
이 순간 멈춘다면, 그들에게 남겨질 미래는 또 다른 이름의 굴종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각, 바다 건너 워싱턴의 어두컴컴한 펜타곤 지하 회의실에서는 두 명의 미군 장교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 위에 연필 한 자루를 얹어놓은 채 조선의 허리춤을 겨누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그 땅에 사는 수천만 민중의 목숨과 피눈물 따위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은, 오직 거대 제국들의 편의와 타협으로 그어질 잔인무도한 분할의 선이 그렇게 태동하고 있었다.
도윤은 인쇄기 너머 칠흑 같은 허공을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제국은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그 폐허의 먼지 속에서 기어 나오는 새로운 어둠은 일제 삼십육 년의 사슬보다 훨씬 더 깊고 지독한 핏빛을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수동 인쇄기가 토해내는 둔탁한 쇳소리만이, 폭풍 속으로 내던져진 청년들의 처절한 비명처럼 어두운 지하도를 타고 메아리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