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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해방에서 전쟁까지 · 제 1화

불타는 히로시마

📅 2026-09-22 15:53•✍️ 만우자•👁️ 1•
첫 회차

1. 지하 인쇄소의 파열음

 

납 활자 냄새가 눅눅한 지하실 공기를 찌르고 있었다.

 

기름때와 검붉은 잉크 찌꺼기가 덕지덕지 엉겨 붙은 명동(明洞) 뒷골목 지하의 수동식 활판 인쇄기는 언제 멈춰 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삐걱거리는 무쇠 롤러 사이로 갱지가 물려 들어갈 때마다, 메마른 쇳소리가 지하실 바닥의 묵은 먼지를 잘게 흔들었다.

 

지상에서는 총독부 헌병대와 순사들의 거친 가죽 장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름의 한복판이었으나 경성(京城)의 거리는 숨을 죽인 채 얼어붙어 있었고, 골목 구석구석은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처럼 팽팽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백열전구 아래서 조판대 위에 활자를 심어가던 한도윤(韓道胤)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소매로 땀을 훔쳐내며 조판용 핀셋을 쥔 손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독립'이니 '해방'이니 하는 말은 아직 이 조판대 위에 얹히지 못했다.

 

지금 찍어내는 것은 전시 배급 통제에 반발하는 소작농들의 호소문과 징용 거부자들을 위한 비밀 연락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얇은 전단 한 장조차 발각되는 날에는 서대문형무소의 시멘트 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기에 충분했다.

 

그 침묵을 깨부순 것은 문풍지를 찢듯 지하실 두꺼운 철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손길이었다.

 

쿵, 쿵쿵.

 

세 번의 짧은 타격, 그리고 숨을 죽인 정적 뒤에 이어진 단 한 번의 무거운 울림.

 

인쇄기 묵판 레버를 힘껏 밀어 넣던 김성호(金成浩)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성호는 숨을 들이켜며 구석 가마니 밑에 비스듬히 숨겨두었던 묵직한 쇠지레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도윤 형, 우리 쪽 신호입니다만…… 평소보다 너무 급합니다."

 

성호의 메마른 음성에 도윤은 말없이 핀셋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숨을 죽인 채 문가로 다가가 옹이구멍에 눈을 대었다.

 

어둑한 복도 계단 끝, 거칠게 헐떡이는 인영의 윤곽이 낯익었다.

 

도윤은 쇳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철문 빗장을 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눅눅한 밤공기와 함께 어둠을 뚫고 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굴러떨어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총독부 체신국 통신과에 연줄을 대고 암호 전신을 은밀히 주시해 오던 이정희(李貞姬)였다.

 

그녀의 모시 저고리 깃은 온통 식은땀과 흙탕물로 얼룩져 있었고, 핏기 없는 입술은 말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문이 다시 닫히고 도윤이 재빨리 이중 빗장을 걸어 잠그자, 정희는 폐부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꺾었다.

 

"정희 씨!"

 

도윤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젖은 어깨를 부축해 일으켰다.

 

성호 역시 쇠지레를 내려두고 물바가지를 떠와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정희 누님, 진정하십시오. 순사 놈들이 따라붙은 겁니까? 통신국 쪽에 무슨 사단이라도 난 겁니까?"

 

정희는 성호가 건넨 물바가지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순사의 그림자에 쫓기는 자의 두려움과는 결이 전혀 다른, 도무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인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꼭 쥔 손가락 틈새로 땀에 젖어 심하게 구겨진 얇은 전보 용지 한 장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본 놈들이……."

 

정희의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첫마디는 짓눌린 신음과도 같았다.

 

그것은 승리의 환호도, 독립의 벅찬 감격도 아니었다.

 

인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의 심연을 목격한 자가 내지르는 전율 어린 비명에 가까웠다.

 

"일본 놈들이…… 끝장나고 있습니다. 완전히, 송두리째 끝장나고 있어요."

 

도윤의 미간이 단단하게 좁혀졌다.

 

그는 정희의 어깨를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정희 씨, 심호흡을 하세요. 그리고 차근차근 말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통신국에서 무엇을 본 겁니까?"

 

정희는 메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통신국 2과 암호선이 온통 마비됐어요. 도쿄 대본영(大本營)과 히로시마 방면을 잇는 모든 군용 유선이 뚝 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공습이거나 폭풍우로 인한 통신망 훼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방금 전, 조선군 사령부 무선실로 본국 참모본부에서 친 최우선 긴급 극비 전문이 날아들었습니다."

 

도윤과 성호의 시선이 동시에 정희의 떨리는 손바닥으로 쏠렸다.

 

성호가 바짝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울리며 물었다.

 

"대본영 전문이요? 미군 놈들이 드디어 본토 규슈에 상륙이라도 했다는 소립니까? 대규모 함대가 몰려왔답니까?"

 

"아닙니다. 상륙 부대가 아니에요. 전함도, 대규모 폭격기 편대도 아니었습니다."

 

정희가 고개를 격렬히 흔들며 구겨진 종이를 도윤의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단 한 발이었습니다. 폭격기 단 한 대가 떨어뜨린 단 한 발의 폭탄으로…… 도시 전체가 지도에서 지워졌습니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석유등 불빛 아래 종이를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다급하게 받아 적은 일본군 군용 암호의 해독 단편들이 붉은 연필로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廣島). 특수 신형 폭탄 낙하. 맹렬한 섬광과 폭압 동반. 시내 일원 교신 완전 단절. 제2총군(第2總軍) 사령부 괴멸 추정. 생존자 식별 불가.'

 

짧디짧은 문장이었으나, 종이를 타고 전해져 오는 무게는 지하실 천장 전체를 짓누를 만큼 무겁고 살벌했다.

 

2. 태양을 훔쳐 온 불길

 

"신형 폭탄…… 특수 폭탄이라니?"

 

성호가 도윤의 어깨 너머로 글자를 더듬어 읽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는 불신과 당혹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윤 형, 이게 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립니까? 폭탄 한 발로 군단 사령부가 날아가고 도시 하나가 사라지다니요. 왜놈 통신병 놈들이 공습에 질려 헛소리를 적었거나, 아니면 전파 교란으로 엉뚱한 전문이 섞여 들어온 것 아닙니까? 미제의 폭격기가 아무리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다 한들, 어떻게 쇠붙이 한 덩어리로 시 전체를 증발시킵니까?"

 

"과장이 아니에요, 성호 씨!"

 

정희가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등불 아래서 붉게 번들거렸다.

 

"도쿄 외무성과 육군성 비밀 전신이 완전히 뒤집어졌단 말입니다! 오구라 육군 병참 기지도, 히로시마 시청도, 철도도…… 그 어떤 시설도 응답하지 않고 있어요. 인근 수비대에서 띄운 정찰기가 보내온 보고를 들었습니다. 도시 상공에 도달하자마자 지상이 하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답니다. 거대한 검은 구름기둥이 만 리 높이까지 치솟아 성층권을 뚫고 올라갔고, 지상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대요!"

 

정희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롭게 꺾였다.

 

"사람들이…… 사람이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녹아내렸답니다. 돌벽과 아스팔트 바닥에 사람 모양의 검은 그림자만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대요! 생지옥이란 말조차 모자라요. 그건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도윤은 갱지를 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고, 거친 종이 표면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증발.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진 인간들.

 

도윤의 뇌리 속에서 수년 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구석에서 숨죽여 탐독했던 서구의 첨단 물리학 학술지의 단편들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아인슈타인의 질량과 에너지 방정식, 원자핵의 분열, 그리고 연쇄 반응.

 

독일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실험실 안에서 계산기만을 두드리며 이론적으로 다투던 그 가공할 에너지의 해방.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라는 미지의 물질이 쪼개지며 터져 나오는 태양의 힘.

 

'설마…… 학자들의 칠판 위에서나 뒹굴던 그 악마의 불씨를 기어이 현실의 무기로 벼려냈단 말인가.'

 

도윤은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늘한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인류가 쌓아온 모든 전쟁의 역사, 화약과 대포와 전차로 치러지던 학살의 법칙이 단 1초 만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미국이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부숴버렸군."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읊조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성호는 공포보다는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하실을 성큼성큼 서성거리며 벅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도윤 형! 그렇다면 왜놈들이 정말로 망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일억 옥쇄니 대동아공영권이니 지껄이던 그 잔혹한 살인마들이 저 하늘의 불벼락 한 방에 무릎을 꿇는다는 거 아닙니까! 도쿄 놈들이 아무리 독종이라 한들 그런 괴물 같은 폭탄을 머리통에 맞고 버틸 수 있겠습니까!"

 

성호는 도윤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그의 두 눈에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울분과 희망이 뒤섞여 타오르고 있었다.

 

"형님, 해방입니다! 마침내 독립이라고요! 우리가 왜 여기서 벌벌 떨고 있어야 합니까? 왜놈들이 불바다에 처박혀 뼈도 못 추리게 생겼는데, 우리가 왜 초상집 귀신마냥 얼굴을 굳히고 있냔 말입니다! 어서 전단을 찍어야 합니다! 왜놈들이 망했다고, 조선의 독립이 눈앞에 왔다고 온 경성에 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윤은 자신을 흔드는 성호의 거친 손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냈다.

 

도윤의 시선은 지하실 구석 곰팡이 슨 벽에 붙은 낡은 동아시아 지도에 멎어 있었다.

 

반도(半島).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턱밑에 매달려 해양과 맞닿아 있는 작고 위태로운 땅.

 

그 주변을 붉은색과 푸른색의 거대한 세력권들이 이리 떼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성호야, 냉정해져라. 숨을 고르고 벽을 봐라."

 

도윤의 목소리는 지하실 바닥의 찬 기운보다 더 낮고 엄숙했다.

 

"저 폭탄이 왜놈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칼날인 것은 맞다. 허나 성호야, 저 불길이 과연 일본 열도만 태우고 얌전히 꺼지겠느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국이 망하면 우리는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사냥꾼이 산에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해서, 그 산이 토끼나 노루의 것이 되더냐."

 

도윤이 지도의 북쪽 국경과 남쪽 해안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저 폭탄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한 몽둥이지만, 동시에 온 세상을 향해 미국이 내지른 패권의 포효다. 저 엄청난 괴물을 목격한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그저 손을 놓고 구경만 하겠느냐? 일제가 무너져 내리는 그 찰나의 공백에, 대륙의 붉은 군대와 바다 건너의 미군이 어디를 향해 내달리겠느냐? 아무런 힘도, 군대도, 준비된 정부도 없는 우리 손에 이 땅이 고스란히 온전하게 쥐어질 것 같으냐?"

 

도윤의 서늘한 질문이 좁은 지하실 벽을 둔중하게 때렸다.

 

성호의 들떴던 눈빛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희는 무릎을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지하실 안에는 활판 인쇄기에서 뚝뚝 떨어지는 기름 방울 소리만이 침묵의 초침처럼 귓전을 울려댔다.

 

3. 제국의 심장, 도쿄의 아비규환

 

바다 건너 도쿄(東京), 황궁 앞 광장을 내려다보는 육군성과 대본영의 지하 지휘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콘크리트 벽면을 따라 촘촘히 얽혀 있던 전신선들은 죽은 신경줄처럼 맥없이 늘어져 있었고, 참모 장교들은 땀과 기름때에 전 군복을 입은 채 미친 듯이 전화 수화기를 돌려대고 있었다.

 

"히로시마! 히로시마 전신국 나와라! 오구라 무선국, 응답하라! 구레(吳) 진수부, 상황을 보고하라!"

 

통신 장교들의 악에 받친 고함이 좁은 통로마다 찢어지듯 메아리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지지직거리는 날카로운 잡음과 불길한 침묵뿐이었다.

 

쾅!

 

지하 작전회의실의 육중한 참나무 탁자가 부서져라 흔들렸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의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좌중을 쏘아보았다.

 

"아직도 현장 사령부와 연결이 안 된단 말인가! 육군항공총대와 제2총군 사령부는 대체 뭘 하고 있나! 하타 순로쿠(畑俊六) 원수는 살아 있는가, 전사했는가!"

 

통신과장인 대좌 하나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다가와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에 들린 보고서는 잉크가 번져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가, 각하…… 방금 전 인근 마쓰야마(松山) 기지에서 긴급 발진했던 정찰기가 타전한 최종 보고입니다. 히로시마 상공 5천 미터에 도달했으나…… 도시 자체가 시야에서 완전히 소멸했다고 합니다."

 

"소멸이라니? 말을 똑바로 해라! 불타고 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도시를 뒤덮은 거대한 백색과 흑갈색의 버섯 구름 외에는, 지상에 남아 있는 건축물의 윤곽조차 식별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항만 시설도, 병참 기지도, 주택가도 전부 평토장처럼 밀려 나갔으며, 대화재의 열풍으로 인해 상공 3천 미터까지 기류가 요동쳐 더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회의실 안의 모든 장성들이 숨을 멈추었다.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와 군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불과 며칠 전, 연합국이 최후통첩으로 던졌던 포츠담 선언을 두고 '묵살(默殺)하겠다'고 큰소리치며 본토 결전을 외쳤던 그들이었다.

 

내지(內地)로 미군이 기어오르면 결호 작전(決號作戰)을 발동하여 일억 제국 신민이 옥쇄함으로써 국체를 보존하겠다는 망상.

 

그 오만과 광기의 누각이, 단 한 발의 폭탄 앞에서 한 줌의 재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신형 폭탄이다……."

 

구석에 힘없이 앉아 있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쉰 목소리로 탄식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돋보기를 고쳐 쓰며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들어온 연합국의 외교 첩보 사본을 매만졌다.

 

"미국 놈들이 기어이 원자폭탄을 완성한 거요. 군부 기술진들이 적어도 10년, 아니 수십 년은 더 걸릴 거라 장담했던 그 괴물을 말이오. 저들은 이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우리 대일본제국의 심장을 재로 만들 수 있는 신의 불씨를 손에 쥐었소."

 

"입 닥치시오, 도고 대신!"

 

아나미 육상이 허리춤의 군도를 덜컥거리며 핏대를 세웠다.

 

"적의 허장성세에 놀아나 황군의 사기를 꺾을 셈인가! 일개 지방 도시 하나가 파괴되었다고 해서 황도(皇圖)가 무너진단 말인가! 아직 우리에게는 만주의 정예 관동군(關東軍)이 있고, 본토 해안을 지키는 수백만 육해군 장병이 건재하다! 적이 원자탄을 몇 발이나 가지고 있겠는가? 기껏해야 한두 발의 실험적 타격에 불과할 것이다! 물러서면 노예가 될 뿐이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아나미! 눈을 뜨시오! 제발 현실을 보란 말이오!"

 

도고 외상이 책상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노쇠한 몸이 격정에 겨워 가늘게 떨렸다.

 

"폭탄 한 발에 군단 사령부와 십수만의 백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만약 저 귀축 같은 무기가 내일 당장 이곳 도쿄에, 황궁 상공에 떨어진다면 폐하의 안위는 어찌 될 것이며 제국의 명맥은 어찌 이어갈 것이오! 그때도 잿더미 위에서 죽창을 들고 옥쇄를 외칠 생각이오? 우리는 이미 졌소! 전쟁을 끝내야 하오! 스위스를 통하든, 아니면 모스크바의 주소 대사를 통하든 하루빨리 종전 협상에 매달려야 한단 말이오!"

 

황궁이라는 말에 아나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방공호 내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제국의 수뇌부들이 모여 앉은 그 밀실은, 이제 전황을 논하는 지휘소가 아니었다.

 

제국주의라는 괴물이 스스로 파놓은 무덤 안에서, 다가올 파멸의 공포에 짓눌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아수라장에 지나지 않았다.

 

4. 백악관의 도박과 붉은 그림자

 

워싱턴 D.C.의 8월 6일은 맑고 뜨거웠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두꺼운 커튼 너머로 백악관 남쪽 뜰의 푸른 잔디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지만, 집무실 내부의 분위기는 바깥의 화창한 날씨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극비 전보를 무거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츠담 회담을 마치고 대서양을 건너 귀국 중인 중순양함 오거스타호 선상에서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의 보고를 거쳐 백악관으로 직행한 전문이었다.

 

'작전 완벽 성공. 폭발 규모 및 파괴력은 당초 계산치를 상회함. 히로시마 군사 시설 및 도심지 완전 무력화.'

 

트루먼은 천천히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루스벨트가 급서한 뒤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을 때, 그가 맨해튼 계획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존재를 처음 보고받고 느꼈던 그 전율이 다시금 혈관을 타고 흘렀다.

 

수십억 달러의 예산과 세계 최고의 두뇌들을 뉴멕시코의 사막에 가두어 넣고 빚어낸 거대한 신의 불꽃.

 

그 불꽃이 마침내 일본 열도의 하늘에서 폭발했다.

 

이제 미군의 본토 상륙 작전인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에서 예상되었던 수십만 미군 청년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승리의 안도감은 찰나에 불과했다.

 

집무실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고 앉아 있던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와 군부의 실무 장성들의 얼굴에는 또 다른 냉혹한 계산이 서려 있었다.

 

"대통령 각하, 전쟁의 군사적 결말은 이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번즈 국무장관이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도쿄의 군벌 놈들이 아무리 광신도 집단이라 해도, 저 무기 앞에서는 무조건 항복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트루먼이 시선을 들어 번즈를 응시했다.

 

"스탈린인가."

 

"그렇습니다. 시계추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번즈가 책상 앞으로 걸어와 벽면에 걸린 거대한 극동아시아 전역 지도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만주 벌판과 그 아래 길게 드리워진 한반도, 그리고 일본 북방의 홋카이도를 차례로 짚었다.

 

"얄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맺었던 밀약에 따르면,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뒤, 즉 8월 8일에서 9일 사이에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모스크바의 첩보기관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히로시마의 섬광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미국이 극동의 승리를 홀로 독식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합참에서 파견된 작전 장교가 긴장된 표정으로 거들었다.

 

"소련군은 이미 극동 바이칼 방면과 극동 전선군에 150만 이상의 대병력과 수천 대의 전차를 집결시켜 두었습니다. 관동군은 이미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스탈린이 진격 명령을 내리는 순간, 붉은 군대의 기갑 군단은 며칠 만에 만주를 짓밟고 한반도 북부 국경을 넘어 남하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서 병력을 추슬러 한반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과 일본 본토의 절반을 점령할 수도 있습니다."

 

트루먼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피를 흘린 것은 미국이었다.

 

진주만의 치욕을 씻기 위해 과달카날의 정글에서, 사이판의 절벽에서, 이오지마의 화산재 속에서 미 해병대 청년들이 뼈를 묻었다.

 

막대한 전비를 쏟아부어 마침내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원자폭탄까지 터뜨려 제국의 무릎을 꿇려 놓았는데, 막판에 소련이 숟가락을 얹어 아시아의 노른자위와 부동항들을 모조리 붉게 물들이게 둘 수는 없었다.

 

"맥아더 장군에게 극동군 사령부의 준비 태세를 최고 단계로 격상하라 전하시오."

 

트루먼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국무·육·해군 3국 조정위원회(SWNCC)에 즉각 비밀 지침을 하달하시오. 도쿄의 항복 문서를 준비하되, 소련군이 극동에서 단독으로 세력을 팽창하지 못하도록 군사적 통제선을 검토해야 하오. 특히 한반도."

 

트루먼의 검지손가락이 지도 위의 좁은 반도를 짓눌렀다.

 

"이곳을 통째로 소련의 손아귀에 넘겨줄 수는 없소. 우리가 군대를 보내어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항복 접수선이 어디까지인지, 군사 실무진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찾아내야 하오."

 

백악관의 밀실에서 오간 그 몇 마디의 대화.

 

그것은 수천만 한반도 민중의 삶과 운명이, 워싱턴 지휘관들의 흑연 연필 끝에서 갈가리 찢겨 나갈 비극의 서막이었다.

 

지구 반대편 강대국의 탁자 위에서, 민족의 운명은 철저히 타자(他者)의 군사적 편의와 전략적 득실로 계산되고 있었다.

 

5. 폭풍의 전야, 경성의 밤

 

깊은 밤, 종로와 명동을 잇는 경성의 도심은 죽은 자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평온함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질식할 것 같은 진공의 정적이었다.

 

지하 인쇄소의 공기는 여전히 납 활자 기름 냄새와 눅눅한 습기로 무거웠다.

 

도윤은 낡은 나무 책상 위에 빛바랜 조선 전도와 경성 시가도를 나란히 펼쳐놓고 서 있었다.

 

성호는 작업대 구석에 걸터앉아 기름 묻은 헝겊으로 쇠지레를 닦아내다 말고, 멍하니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도윤 형…… 만약 왜놈들이 정말로 손을 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호의 음성은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두려움과 함께, 수십 년간 억눌려온 식민지 청년의 거역할 수 없는 갈망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저 왜놈 순사들과 헌병들이 물러가면, 중경(重慶)에 계신 임시정부 어른들이 돌아오시는 겁니까? 광복군이 총을 메고 종로통을 행진하고, 우리 손으로 투표를 해서 우리 나라의 정부를 세우는 겁니까? 형님, 정말로 그런 날이 오는 겁니까?"

 

도윤은 지도를 내려다보던 눈길을 돌려 성호를 바라보았다.

 

성호의 그 순진하고도 뜨거운 눈망울을 마주할 때마다 도윤의 가슴 한구석통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 땅의 모든 아비와 어미들, 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간 수많은 누이와 형제들이 40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꿈꾸어왔던 유일한 아침.

 

하지만 국제정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결코 힘없는 자들의 순수한 피눈물을 동정하지 않았다.

 

도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성호야.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환상에 취해 있으면 도끼가 발등을 찍는 줄도 모르는 법이다."

 

도윤이 지도의 북쪽 국경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만주에는 여전히 관동군의 잔당들이 버티고 있지만, 그 너머 연해주와 시베리아에는 붉은 군대의 철갑 군단이 발톱을 갈고 있다. 그리고 저 남쪽 바다 건너에는 방금 히로시마를 불바다로 만든 미합중국의 거대한 함대가 떠 있지. 일제가 무너지면, 이 반도는 해방의 낙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 거대한 두 맹수가 서로의 목덜미를 노려보며 맞부딪치는 격전장이 될 게다."

 

"격전장이라니요……."

 

벽에 기대어 있던 정희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왜놈들이 물러난 자리에서, 미국과 소련이 또다시 우리 땅을 전쟁터로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피를 흘리는 전면전이 될지, 아니면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저희들 몫을 갈라먹는 밀실의 야합이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도윤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깊게 파고들어 찌릿한 통증이 번졌다.

 

그 통증만이 마비되어 가는 감각을 일깨우는 유일한 닻이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단 하나요. 저들이 하늘에서 신의 불벼락을 터뜨리고 대륙에서 수천 대의 전차를 굴릴 때, 우리는 손에 쥔 소총 한 자루, 우리 목소리를 온전히 낼 자주적인 힘이 없다는 사실이오. 스스로 제 집을 지킬 힘이 없는 자의 운명은 언제나 남의 식탁 위에 올려진 고깃덩이에 불과했소. 구한말(舊韓末)의 비극이 바로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소? 청국 놈들과 왜놈들이 우리 땅에 제멋대로 기어들어와 칼부림을 하더니, 결국 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켰지."

 

도윤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지하실을 무겁게 채웠다.

 

성호는 입술을 깨물었고, 정희의 눈가에는 맺힌 눈물이 번져 내렸다.

 

그때였다.

 

지상으로 난 좁은 환기창 틈새를 뚫고,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경성의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었다.

 

위잉—!

 

위이이잉—!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쇠북을 두드리는 불길한 타종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이어 거친 트럭 엔진음과 함께 수십 발의 군화 소리가 아스팔트를 짓이기며 질주해 왔다.

 

"비상이다! 총독부 전원 비상소집!"

 

"거동 수상자를 색출하라! 통행금지 시각 이후 거리에 나온 자는 가차 없이 발포한다!"

 

일본어로 악을 쓰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의 앙칼진 목소리가 골목 어귀를 때렸다.

 

지하 인쇄소의 천장이 덜컹거리며 미세한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성호가 기겁하여 석유등의 심지를 낮추려 손을 뻗었다.

 

"불 끄지 마라, 성호야."

 

도윤이 단호한 목소리로 성호의 팔을 잡았다.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 도윤의 두 눈동자는 차갑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윤 형, 순사 놈들이 골목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헌병 트럭까지 들어왔어요!"

 

"저놈들이 저토록 악을 쓰며 날뛰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제국의 명줄이 끊어지고 있다는 공포에 질려 발악하는 것이다. 히로시마의 화염이 저 간악한 자들의 심장까지 새까맣게 태우고 있다는 증거다."

 

도윤은 작업대 옆에 쌓여 있던 갱지 뭉치를 끌어당겨 인쇄기 활판대 위에 단단히 물렸다.

 

그리고 몽당연필을 쥐고 백지 위에 굵고 힘찬 필체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의 심장이 무너졌다. 인류 최악의 화염이 히로시마를 삼켰고, 일제의 패망은 시각을 다투고 있다.'

 

도윤이 고개를 들어 성호와 정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저들이 숨기려 드는 파멸의 진실을 활자로 박아내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이 땅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 일본이 무너진다고 넋을 놓고 환호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빈집에 늑대가 나가고 더 무시무시한 곰과 표범이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가 맞이할 내일이 어떤 가시밭길인지 눈을 똑똑히 뜨게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성호는 도윤의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며 쥐고 있던 쇠지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인쇄기 잉크 롤러의 손잡이를 굳세게 잡았다.

 

정희 역시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는 조판 상자에서 납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했다.

 

끼이익, 쿵.

 

어둠 속에서 활판 인쇄기의 무거운 쇳소리가 다시금 규칙적인 박동을 내뿜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히로시마를 집어삼킨 백색의 거대한 불기둥.

 

그 파멸의 빛은 마침내 반세기에 걸친 가혹한 식민 통치의 사슬을 끊어낼 해방의 새벽인가,

아니면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이 작은 반도를 반 토막 내어 또 다른 비극의 심연으로 밀어 넣을 냉전의 검은 그림자인가.

 

명동 뒷골목의 음습한 지하에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마주한 젊은이들의 거친 숨결이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

첫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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